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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피로스 Jun 12. 2020

일찍 일어난 백수가 글 하나도 더 쓴다

백수일지 D+1  (2020.06.12)

2020년 6월 12일 평범한 금요일 아침 오전 8시.

누군가는 회사에 출근해 업무를 시작하고, 학생들은 1교시를 시작하는 시간.


백수가 되면 시간관념이 무뎌집니다. 평일과 주말의 경계가 흐려지고, 낮과 밤의 구분이 무뎌지죠. 직업이 없는 백수라도 일상을 의미 있고 알차게 보내려면 나름의 계획을 꾸준히 실천하고, 일상의 리듬을 유지하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정신줄 똑디 안 잡고 살면 게으름이란 거대 괴물자식에게 눈 깜짝할 새 꿀꺽 잡혀 먹기 십상이죠. (일상의 리듬이 무너지면 그 후엔 완전한 상바보가 되더라구요. 뇌가 굳어가고 멍청해지는 걸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끔찍한 나날의 연속. 아아...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리고 그냥 존댓말 쓰기로 했습니다. 어제 처음으로 일지를 작성한 뒤 자기 전에 두 번, 눈 뜨자마자 한 번 다시 글을 읽어봤습니다. 저를 구독해서 알림이 떴는지, 글을 읽은 제 친구가 한 마디 하더군요. "네 글에서 관종의 냄새가 난다." 제가 읽어봐도 그렇더군요. 하루 만에 마음을 바꿨습니다. 역시 저는 소심해서 '다나까+요'가 편한 것 같습니다. 왠지 스스로가 아니라 처음 보는 누군가에게 반말을 지껄이는 것 같아서 불편해요. 비장하게 이 글은 나를 위한 일기라고 뻔뻔하게 선포해놓고 하루 만에 태도 전환해서 죄송합니다. 역시 오픈된 공간에서 나만 읽는 것도 아닌데 나만 잘 읽자고 무언가를 쓰는 건 어렵네요. 그래서 관종처럼 써보기로 했습니다. 진짜 나를 위한 일기는 따로 또 하나 더 씁니다. 여기선 욕을 못쓰겠어요.


어제 다섯 분이 제 글에 '좋아요'를 눌러주셨습니다. 사랑합니다. 11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밤, 이렇게 재미도 의미도 없는 글을 선뜻 읽고, 좋아요까지 눌러주는 천사 같은 마음씨를 가진 당신들이 있기에 세상은 역시 살만한 곳입니다. (안쓰러워서, 혹은 욕을 남기려다가 실수로 남기신 분들이 있을지도요. 그래도 땡큐.)


백수는 더 뒤처질 곳도 없다. 나아갈 일만 남았을 뿐이다. 전진전진. 근데 어딜 향해?


전 아침에 일기를 씁니다. 그래 봤자 시작한 지는 얼마 안 됐습니다. 이미 프라이빗한 일기는 짤막하게 썼고, 그다음 이 일지를 씁니다. 백수의 최대 장점은 역시 시간이 많다죠. 온전한 하루를 내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인생은 컨트롤 못한다는 게 함정. 언젠가는 가능하겠죠. 믿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아침에 쓰는 일기는 그 나름의 맛이 있습니다. 머리를 맑게,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할 수 있게 해 주죠. 백수는 언제나 불안감에 시달리며 삽니다. 눈 뜨자마자 오늘은 어떻게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낼까, 앞으로 에 대한 걱정이 몰려옵니다. 재수 없게도 매일 아침마다 말이죠. (당신들에겐 출퇴근의 행복이 있잖아. 죄송합니다 한 번도 안 해봐서요.) 아침에 가벼운 독서를 하고, 가볍게 일기를 쓰면 상쾌한 아침부터 그렇게 머릿속을 배회하다 뇌에서 난동부르스를 치는 잡념과 불안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진정해 워워. 하얀 백지 노트에 꾸-욱 꾸---욱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 가다 보면(가끔 아침부터 스스로에게 욕지꺼리를 날릴 때도 있습니다.)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비로소 온전한 이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백수의 아침은 나와의 싸움, 내면의 전쟁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승리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브런치를 매일 아침마다 쓰기는 어렵겠지만, 쓰고 싶을 때 아무 때나 써야겠습니다. 벌써부터 걱정이 됩니다. 물은 엎지르고, 일은 저질러놨는데 앞으로 뭘 써야 하나. 대책 없는 자식입니다. 우선 밝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선,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겠죠. 허허. 앞으로 펼쳐질 호로 환타스틱 블록버스터급 백수 연대기는 백수가 이제껏 어떻게 살아왔나에 대한 이야기로 먼저 문을 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매번 나에게, 그리고 전국에 계신 백수 여러분을 위한 구호로 마무리를 지을 겁니다. '백수들이어 일어나자. (우선 침대에서부터 잘 일어나자.) 앞으로는 백수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백수가 직업이 없지 할 일이 없습니까.'


p.s

백수와 프리랜서의 차이는 뭘까요? 한 끗 차이인 것 같습니다. 내가 이 일을 나의 직업으로 인정하느냐, 아니냐. 똑같은 일을 해도 누구는 스스로를 프리랜서라 칭하고, 누구는 백수라 부릅니다. 본인의 마음가짐이죠. 저는 아직 수익을 내는 일도, 하나의 그럴듯한 일로 삼아 직업이라 부를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순도 100% 백수. 이 미묘하지만 결정적인 표현의 차이는 타인이 나를 보는 시선, 그리고 내가 타인에게 어떻게 비춰지고 싶어 하는 가에 대한 인정의 욕구가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냥 뭐. 쉽게 말해서 지가 떳떳하면 프리랜서라 하고 아니면 백수라 하는 건가. 쓰잘데기 없이 아침부터 백수로서의 나에대한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한 번 던져봤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백수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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