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지기에 잃어버릴 뻔한 '나'를 찾아가기
우린 모두 저마다의 비밀스러운 공간에
굳게 닫힌 서랍장을 하나씩 갖고 있습니다.
긴 시간 열어보지 않아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는 채로 말이죠. 마음속 깊은 곳, 혹은 어두운 기억 저편에 적막히 놓여 있는 그 서랍 안엔 아무도 모르는 자기만의 보물들이 숨겨져 있단 걸 이제껏 잊고 살았습니다.
잃어버릴 뻔한 보물들을 찾게 된 건 순전한 우연이었습니다. 브런치의 작가 공모전 <나도 작가다>란 이벤트를 발견했고,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라는 주제가 눈에 띈 것이죠. 그 순간 당선이나 혜택 같은 말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아, 이걸 계기로 그렇게 오랫동안 써보고 싶었던 글을 한 번 써볼 수 있겠다!" 란 기대가 생기며, 한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묘한 흥분과 떨림이 가슴속에서 멈추질 않더군요. '남들보다 특출 나게 잘하는 것 하나 없는데 무얼 글로 쓰나'란 생각에 의욕이 한 풀 꺾이긴 했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쓸 수 있는 '나'라는 주제가 있기에 일단 해보기로 마음먹었죠. 그리고 나서 지난 2년 동안의 내 모습을 되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대학 졸업 후 취업은 제쳐두고 꿈에 그리던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세계일주를 위해 필요한 경비 마련과 영어실력 향상이란 단순한 목표를 세우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호주로 떠났죠. 1년 안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일주를 시작할 계획이었지만,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예상치 못한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성과가 만족스럽지 못해 1년을 더 머무른 후에야 간신히 호주 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었죠. 그러나 호주 출국 두 달 전, 코로나의 여파로 일주는 잠정적으로 무기한 연기되었고, 무엇보다 2년 간의 고된 생활로 인해 몸과 마음이 많이 피폐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꿈을 좇아 부푼 마음으로, 세계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을 때의 패기와 열정은 어느샌가 사라져 버리고, 한국에 돌아오니 저는 이도 저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내렸던 걸까, 지금의 나는 뭐지,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해진 현실과 미래, 그리고 나약해진 자신을 마주하는 게 고통스러웠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무기력함 속에선 앞을 향해 한 발자국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가 않더군요. 그래서 알고 싶어 졌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지난 2년, 나는 어떻게 살았길래 지금처럼 나약하고 초라해졌을까 말이죠'. 그리고는 우연히 책장 구석에 꽂혀있는 일기장을 펼쳐보게 되었습니다.
평소 쓰고 덮어뒀던 일기장을 다시 읽어보는 편은 아닙니다. 그런데 지난 2년의 시간을 담아둔 일기장에는 흥미로운 내용들이 참 많더군요. 마음이 혼란스럽고 어려울 때마다 조금씩 새겨둔 내 생각과 감정의 흔적들이 마치 나에게 말을 거는 듯했습니다. '너가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니야.' 두 권의 일기장 속에는 힘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외쳤던 위로와 응원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것 같은 때에 나를 지지하고 북돋아주던 책 속의 귀한 구절들이, 매일 새롭게 다져온 작은 각오들, 그리고 꿈을 위해 포기하지 않았던 희망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있었습니다.
서랍 속에 처박혀 있는 외장하드를 열어봤습니다. 의미 없는 데이터로만 남겨져 차곡히 쌓여온 방대한 사진과 영상 기록들. 그 속엔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지난날 인생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펼쳐져 그 시절이 그렇게 암울하고 별볼일 없던 시간만은 아니었단 걸 보여주더군요. 함께 웃고 떠들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소중한 사람들과의 추억과 그리움이 또 새롭고 낯선 환경에서의 삶 속 다양한 경험을 통해 얻은 배움과 뿌듯함이 저장돼 있었습니다. 어려운 시기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던 사진 속 나의 당당했던 모습까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게 잔잔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니 이상하게도 힘이 나더군요. 먼지 묻은 기록들 속에 감춰져 있던 지난날 나의 생생한 기억과 감정들을 다시 마주하다 보니 마음이 진하게 저려왔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뭔가를 되찾은 것처럼요. 지금의 내가 예전의 나를 오해한 것 같아 스스로에게 미안했습니다. 나아가 지금까지 잘 살아와준 자신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생기더군요. '봐봐. 너 꽤나 애썼잖아. 그 시간은 충분히 값지고 행복했어.'라고 말하듯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위로해주는 것만 같았습니다.
작은 일기장과 사진들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살아가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겠죠. 다만 그 숨겨져 있던 지난날의 기록들은 따스한 위로와 응원으로 다가와, 제가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는데 분명한 힘이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흩어져 있던 내 마음의 조각들이었고, 지금의 나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 것입니다. 자칫 천천히 잊혀져, 영원히 잃어버릴 뻔한 '나'라는 소중한 보물들로 말이죠.
막막했던 현실이 뒤바뀌고, 가리어진 앞길이 환하게 밝혀진 대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되찾은 나의 모습으로 다시 힘 있게 살아가 보려고 합니다. 2년 전 출국을 위해 공항에서, 새롭게 펼쳐질 인생의 도전을 마주하며 쓴 제 일기장 첫머리에는 이렇게 쓰여있더군요.
"오늘 첫걸음을 내디뎠다."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게 한 이 첫걸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오늘, 또다시 기억될 새로운 첫걸음을 내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