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 그녀와의 심리전
"내일 아침 8시에 보험 아줌마 온다."
어제 저녁 엄마가 말했다.
아..
왜 아침 8시인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난 아침 시간을 방해받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 시간에 오겠다고 했던 설계사분이나
거절하지 못하고 오라고 한 어머니나
이른 아침부터 고객의 집을 방문하는
그분의 저의와 심리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오늘 아침
정확히는 7시 45분.
약속된 시간보다 15분 일찍
그녀가 초인종을 누르고 들어왔다.
익숙한 얼굴이다.
부모님의 보험을 10년째 맡고 계신 분.
아주머니의 방문 목적은
이번에 새로 들게 될 어머니의 질병보험.
"안녕하세요(해맑은 미소)"
밝게 웃으며 들어오시는 아주머니.
하지만 난 밝지 못했다.
"네 안녕하세요(경직된 미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녀는 고수였다.
격식 없는 짧은 대화가 오가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태블릿을 켜시는 아줌마.
상품과 약관에 대한 설명보다
가입 절차를 먼저 진행시키고 계셨다.
능수능란한 말투와 손짓.
'긴장해야겠다.'
부모님께서 오랫동안
보험에 대한 모든 걸 믿고 맡기셨던 분이지만
이것도 분명 거래다.
'방심하면 호구된다.'
마음의 준비를 했다.
최근까지 보험에 대해선 일자무식이었다.
작년에 부모님께서 내게 들어놓으신
오래된 보험을 해지했다.
이젠 내 보험도 스스로 관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보험이란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것인지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한
보험의 가장 무서운 점은
이게 뭔지도 자세히 모르는 상태로
들어버리게 된다는 점.
아는 사람을 통해서나
모르는 사람을 통해서나.
그래서 방법은 두 가지다.
내가 보험에 대해 정말 잘 알던지
정말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을 하던지.
보통은 후자가 더 쉽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방법을 택한다고 본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그 상품이
오늘 8시부터 개시라 일찍 왔어요.
한정 상품이라 없어지기 전에 처리해야 되거든요."
아줌마는 명분이 있었다.
지난번 허리를 다친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처럼 입원 이력이 있는 사람은 보통
새로운 보험을 가입하기가 어려운 조건이다.
그런 사람도 좋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한정적인 '특별한' 상품을 우리에게 준다는 것이다.
난 미심쩍었다.
뭔가 특별한 혜택을
우리에게'만' 주는 것처럼 말하는
그녀의 능글맞은 '배려'가.
그녀는 놀라웠다.
어머니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말을 하는 입보다 손이 더 빨리 움직이고 있었다.
대화의 내용 중 상품에 관한
영양가 있고 본질적인 내용은 거의 없는 듯했다.
내가 먼저 선수를 쳐보기로 했다.
"저... 이번 보험 상품에 대해서
간략하게 좀 설명을 먼저 해주시겠어요."
제 할일 하느라 아주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그녀의 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아주머는 당황하지 않았다.
친절한 응대와 함께
생소한 용어와 복잡한 내용들로 받아쳤다.
진단금이니, 담보니, 실손이니, 무배당이니
절반도 이해가 안 갔다.
좌절감이 들었다.
'젠장, 난 분명 설명을 듣고 있는데
왜 무슨말인지 모르겠지.'
뭔가 찜찜했다.
알 수는 없지만 뭔가
눈 뜨고 코 베이는 기분.
상품 설명서를 가리키며 또 한번 물었다.
"초간편 종합 보험이라서 그런지
종합적으로 보장 항목은 많은데
개별 항목에 대한 가입금액이 그렇게 크지는 않네요."
아주머니의 눈빛에
미묘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내가 해석한 아주머니의 눈빛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듯했다.
'오호라.
이것 봐라?'
아주머니가 약간 움찔했다.
이 상품은 이런 성격이 있고
이런저런 한계가 있지만
그래도 기승전 '좋다, 들어야 한다.'
라고 결론을 지었다.
설명을 다 듣고 난 뒤에도
찝찝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뭔가를 더 묻고, 캐내야 하는데
이 보험이 정말 어머니에게 필요하고 맞는 상품인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내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줄 만족스러운 정보가
아주머니의 입에선 속 시원히 나오질 않았다.
"아 그럼 이 부분은 뭐죠?"
"그럼 부모님께서 들어 놓으신 보험들을 비교해보면..."
"다 해서 비용은 얼마 정도일까요?"
"여기서 부족한 내용은 없을까요?"
질문을 마구 쏟아냈다.
당황한 아주머니의 미묘한 기색을 눈치챘다.
하지만 표정과 말투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리고
어느새 가입이 끝났다.
더 손 쓸 새도 없었다.
뭔가
김 빠지게 져버린 기분이었다.
이제 좀 싸워보려는 찰나에
눈 깜짝할 새 승부가 나버린 그런 상황.
그녀는 판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는 게 많았고 경험이 많았다.
나는 많은 걸 물어봤지만
많은 걸 얻어내진 못했다.
어머니는 10년을 거래한 사람이라는 신용과
아버지의 판단에 의지했고,
나는 이 아주머니를 어찌어찌 상대해 볼 수 있겠다는
허황된 자신감과 오만에 의지했다.
그녀가 이겼다.
엄마는 순식간에
15만원짜리 새로운 질병보험을 들었다.
중요한 건 모든 절차가 끝난 뒤에도
난 어머니가 든 저 보험이
정확히 어떤 상품인지
아직도 잘 이해를 못하겠다는 점이다.
무지한 나의 안타까운 결말이었다.
그래 내가 졌다.
나도 합리화를 한다.
'그래 저 인상 좋은 아주머니께서
알아서 잘해주셨겠지.'라고
기분이 묘하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지만
왜 난 아주머니에게
계속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하는 걸까.
보험 설계사라는 직업이
참 힘든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는 좀 미안하면서
한편으로는 좀 분했다.
공부하며 살아야겠다.
뭐든 앞으로 죽을 때까지.
보험 공부는 더더욱.
내 지식이 살아가는데 쓸모가 있을 때까지
내 주변에 더 믿을만한 설계사가 생길때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