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들기 전 떠올랐던, 기막힌 아이디어가 다음날 눈뜨고 일어나면 기억나질 않는다. 내가 기록을 하는 이유다. 왜 기록하는가?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니까. 기억력이 아무리 좋아도 모든 걸 기억할 순 없다. 기억과 기록은 한 글자 다르지만 동시에 천지차이다. 그 어떤 아이디어와 영감일지라도 기록의 과정을 거쳐 세상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 기억은 불완전하지만(내꺼인듯 내꺼아닌 내꺼같은 너), 기록은 변하지 않는다. 기억은 날 배신하지만, 기록은 배신하지 않지.
그 어떤 참신한 아이디어와 영감일지라도 '기록'이란 옷을 입지 않고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기록이란 무엇인가? 한 순간에 떠오르는 생각, 스쳐가는 감정과 같은 것들은 지나가버리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기록은 이러한 생각과 감정 같이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실체가 없는 것들에 형체를 입혀 세상에 존재하게 만드는 일이다.
메모지에 써놓는 글처럼 문자뿐만 아니라 사진, 그림, 음악, 영상 등 내면의 뭔가를 끄집어내어 세상 밖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모든 게 기록의 수단이 된다. 다시 보니 세상만사 모든 것이 기록을 하는 행위다. 내가 있으라 하기 전엔 없는 그것. 표현해내지 않으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그 무언가에 생명을 주는 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행위. (허허 써놓고 보니 예술적이지 않은가.)
가장 많이 이용하는 네이버 메모. 좋은 구절을 스크랩해두거나, 글쓰기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 남겨둡니다.
어떻게 기록하는가?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를 메모지에 적어놓던, 자기 전에 일기를 쓰던, 블로그에 글을 쓰고 인스타에 사진을 올리던 방법은 다양하다. 자기만의 방식을 찾으면 된다. 중요한 건 어떻게 기록하는가 보다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남겨두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단 걸 잊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기록하는 가에 대한 질문에 정답은 없다. 예술에 답이 없는 것처럼.
대학시절부터 만들어온 상황판. 스쳐 지나가거나, 버리기 아까운 아이디어들을 바로 덕지덕지 붙여놓아요. 제게 메모는 눈에 잘 보여야 나중에 활용하기가 쉽거든요. (확대금지ㅋ)
쓸모 있는 기록이란 무엇인가? 기록도 하나의 데이터다. 열심히 남겨놨는데 써먹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런데 기록이 '가치'있게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기록은 당장 써먹지 않기 위해, '지금' 써둔다. 바로 필요하지 않지만, 잊지 않기 위해, 나중에 활용하기 위해 붙잡아 둔다. 미래를 위한 것이다. 다만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 보면 뭔가를 기록해놨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리기 일쑤다. 하지만 괜찮다. 기록은 죽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게 기록의 가장 큰 쓸모다. 어딘 가에 파묻혀 있어,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죽지만 기록은 죽지 않는다ㅋ
나는 살면서 기록의 '덕'을 참 많이 본 사람이다. 어렸을 때부터 뭐든 잘 써놓고, 보관해두는 습관이 있었다.(기록병에 걸린 사람은 '수집'병에 걸렸을 확률도 높다. 나처럼.) 10년 전에 썼던 플래너를 보면서, 3년 전에 쓴 일기장을 보면서 그 시절의 나를 회상한다. 이처럼 기록은 나만의 언어로 세상을 이해한 흔적이기도 하다. 기록은 시간을 담고 있다. '과거의 나'를, 객관화시킨다. '현재의 나'라는 타자의 시선으로 마주하고,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내 모습이 담긴 예전의 기록들을 하나하나 찾다 보면, 잊고 있던 그 시절의 나와 세상이란 그림의 퍼즐 조각이 하나씩 하나씩 맞춰져 가는 기분이랄까.
"나의 언어로 살아가기 위해 나는 쓴다."
세상을 나의 언어로 바라보고 이해하기 위해,
한 때 존재했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지워져 가는 '나'를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이 질문은 내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번역된다.
남의 언어에 휘둘리지 않고 나의 언어로 살아가기 위해 나는 쓴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