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떠보니...
"일단 살고 봐야지!"
갑작스레 불어난 강물...함께 물놀이를 즐기던 친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강물로 뛰쳐 들어가 친구들을 찾으려는 나를 온 몸으로 막아서는 남자.
"안돼! 지금 누굴 신경쓰는 거야. 정신차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비교적 냇가 근처에 있었던 나만이 이 아저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나 보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불과 몇 분 전만해도 유유히 흐르는 강가에서 물장구를 치고 있던 우리 였으니 말이다. 이 것이 흔히들 말하는 물의 무서움인가 보다....
" 이제 움직이자."
나를 구해준 아저씨.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하는 이 자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괜히 겁부터 난다. 아무리 냉철한 사람이라도 이 사람처럼 표정의 변화가 없기는 힘들 것 같다. 처음 나를 구해 올릴 때도 지금도 그의 표정은 한 결같다.
그런데 이 아저씨 뿐만이 아니라 나 역시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나는 지금 사고를 당한 상황이다. 친한 친구들은 모두 강물에 휩쓸려 생사를 알 수 없고,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 그런데 내 마음 속 감정의 기복이 없다. 이상하게 더 신중 해지고 냉철하다.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라는 생각이 내 머릿 속을 지배한다. 친구들 한테는 매우 미안 하지만 말이다.
강가를 따라 계속 걷고 있다. 문득 궁금해졌다. 난 왜 정체가 불 분명한 이 남자를 따라 걷고 있는 것인가?
"저기요...아저씨...그 건 그렇고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일단 사고가 났으니 신고부터 해야 되는 게 순서 아닌가요?"
반응이 없다. 그는 그저 앞만 보고 걸을 뿐이다.내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지만 지금 그의 행동은 조금 무례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뭐... 일단은 아저씨를 따라 걸어 보자.
얼마나 걸었을까? 처음엔 그저 아저씨의 뒷통수만 보고 걸었다.그래서 주변 풍경들을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내가 지금 어디를 향해 걷는 지...얼마나 걸어야 할지는 안중에도 없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아무 말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그 사람의 뒷 통수를 보고 있노라니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슬쩍 고개를 돌려 좌우를 살펴 본다.
"어???? 뭐지??? 뭐가 이리 새까맣지?"
푸르른 잎을 자랑하는 나무들도 하늘도 심지어 친구들을 휩쓸고 간 강물까지도 온통 새 까만색이다.유일하게 빛을 가지고 있는 물체는 내 앞에서 하염없이 걷고만 있는 저 아저씨 뿐이었다. 하얀 피부에 눈썹과 머리카락까지 온통 하얀 사람. 처음에 그를 만났을 때는 별 생각 없었는데 주변 환경과 그를 비교해 보니 순간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걸음을 멈췄다. 왜 처음부터 난 의심을 하지 않았지? 이건 분명히 뭔가 잘못 됐다. 더 이상 그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
"걸음을 멈추지마 정신차려!!!"
내가 발걸음을 멈추자 흰 빛깔을 내고 있는 그 남자가 외친다. 여전히 걸으면서 말이다.
"어딜 가는 건데요? 아저씨..잠시만요.... 제 목숨을 구해 주신 건 감사 드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작정 제가 누구인지 정체도 모르는 당신을 따라 가야만 하는 이유라도 있나요?"
남자가 잠시 주춤 하는 가 싶더니 이내 말을 이어 나갔다.
"그냥 입 다물고 따라와..억울하며 나를 잡아 세워 줘 패버린던가? 아님 그냥 여기서 다 포기하고 뒤지시던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걸음이 더욱 빨라지는 남자.
"아 진짜 저 아저씨 아무리 은인이라지만 말하는 X가지 하곤..."
화가났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이라도 잡아 땅에 패대기 치고 싶다. 삐쩍 말라가지고 힘도 없어 보이는 주제...
그런데 일단은 저 아저씨를 따르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어둠 그 자체였다. 조금 전 보다 더 어둠이 깔린듯한 이 곳. 앞서가는 아저씨를 한 번 쳐다 본다. 그리고 문득 뇌리를 스쳐 가는 생각.
"놓치면 X된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지금까지 내가 아저씨의 뒷 꽁무니를 쫓아 걸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가 사고를 당해 경황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애시당초 이 곳은 짙은 어둠으로 뒤 덮힌 공간이었다.그렇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흰색 빛을 띄고 있는 남자를 쫓아 걷고 있었던 것이다.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를 쫓아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남자의 걸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빨라지고 내 숨은 차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다. 남자를 잡아야 한다. 놓치는 순간 칠흙같은 어둠에 갇혀 죽는다. 놓쳐서는 안 된다.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그를 쫓는다.
눈물이 난다. 서럽다. 겨우 나만 살아 남았다고 생각 했는데 아직 나 역시 완전히 목숨을 구했다고 단정 짓기엔 이르다. 아직 세상에 이루지 못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대로 죽기에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떻게든 살아야 겠다. 그 순간 그저 걷기만 하던 내 마음에 변화가 생긴다. 단순히 걷는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걷는 것이다.이를 악문다. 더 이상 거리가 벌어져서는 안 된다. 난 그의 옷깃을 잡기 위해 무감각해지는 다리에 힘을 준다.
그렇게 힘차게 한 발 한 발을 내딛다 보니 남자의 옷깃이 손에 닿을 거리까지 좁혀졌다.
'조금만....더.....더!!!!"
그 순간 새 까만 어둠으로 뒤덮힌 산등성이에서 낯 익은 목소리가 메아리 친다.
"힘내!!!! 제발!!!"
친구들이 나를 향해 응원하고 있는 목소리 였다.
순간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혼자 살아 남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행이라 생각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그들의 응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하지만 감정에 사로 잡혀 내 발걸음을 늦추지는 않는다. 그래야 잡을 수 있다. 그래야 이 곳에서 벗어 날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힘차게 뻗은 내 손 안에 남자의 옷깃에 들어 온다.
"대훈아~~~ 정신이 들어? 와!!!! 살았다!!!"
눈이 부시다. 조금 전까지 내가 갇혀 있던 세상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이 곳은 환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뭐....뭐야 이게 어떻게 된거지?"
갑작스레 내가 있는 공간의 환경이 급변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
강물에 휩쓸려 죽었다고 생각한 친구들이 전부 이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뭐가 어떻게 돼 임마.....레프팅 도중에 니가 급류에 빠져 휩쓸렸잖아...운 좋았다. 니가 놓치지 않고 쥐고 있던 노가 바위 틈에 걸려서 더 이상 휩쓸리지 않았어."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보트와 함께 세워진 하얀색 플라스틱 노가 눈에 들어 온다.
피부와 머리카락 온통 흰 빛깔을 띄던 남자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