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골의 디 오터(The Otter) 펍
'시험기간.' 그 어떤 시험기간 보다 가장 힘들었던 때는 영국 석사과정 마지막 학기 었던 2017년 5월이었다. 체력적으로 힘들었고 정신적으로 가장 피폐했던 시기였다. 5월 한 달 내내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세미나를 매일 듣고 시험 6개 과목을 준비해야 했다. 게다가 6개 과목의 과제물(페이퍼와 프라블럼 세트) 데드라인 시기였다. 인생에서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하다 보니 정신적으로 힘들었고, 앉아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몸이 쉽게 지쳤다. 놀고 싶은 유혹도 한 달 동안 꾹꾹 억눌러야 했었다. 지금 돌아보면 5월은 정말 단조로우면서도 다이내믹했었다. 인생에서 가장 취한 날 Top 3를 고르라고 한다면 5월 중 어느 날도 포함된다. 과음하면 안 된다는 인생의 아주 기본적인 교훈을 몸소 다시 느낀 때도 이때였다.
매일 일상이 똑같은 루틴으로 반복되었다. 기숙사-식당-도서관-기숙사. 모처럼 따사로운 햇살이 도서관 전면 창으로 들어왔다. 뜨겁지 않고 따스했다. 펍 야외에서 맥주를 즐기기 딱 좋은 따스한 햇살이었다. 햇살을 느끼는 순간 도저히 공부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바로 친구들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로 펍에 가자고 했다. 잠시나마 시험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학교 주변에 있는 단골 펍 대신에 걸어서 한 시간이나 떨어진 디 오터(The Otter) 펍을 가기로 했다. 어느 누가 바쁜 시험기간 중에 한 시간 걸어 펍을 가겠나.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멍청한 선택인데 그 당시에는 그런 선택을 하고 기분이 좋았다. 시험에서 벗어난 사소한 일탈이라 기분이 좋았던 거 같다. 시험과 과제에 찌든 6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디 오터(The Otter) 펍 원정대가 학교 캠퍼스에서 출발했다.
나름의 사소한 일탈로 한 시간을 걸어서 펍에 갔지만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친구들과 시골길을 걸으면서 얘기하는 동안 친구들에 대해 더 알게 되었고, 차가 없는 뚜벅이라 주변 경관을 좀 더 자세히 느낄 수 있었고, 따뜻한 햇살을 느끼면서 광합성을 했고, 소와 말들이 풀을 뜯어먹는 전원적인 모습도 보고, 사방이 벽으로 갇힌 도서관과 달리 어디가 끝인지 보이지도 않았던 이름 모를 노란 꽃 밭을 보면서 답답했던 감정을 마음속에서 날려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노팅엄의 아름다운 시골을 두 발이 아닌 열 두발로 함께 걸어갔다.
그렇게 도착 한 디 오터(The Otter) 펍.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시골에 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국 시골 구석에 카페가 있는 것처럼 이 펍도 영국 노팅엄의 시골 구석 어딘가에 있던 펍이었다. 어디를 가던지 카페가 있는 우리나라처럼 어디를 가던지 카페 대신에 펍이 있는 나라가 영국이다. 시골에서 카페보다 펍 찾기가 더 쉬운 나라가 영국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펍 앞에는 들판이 있고, 펍 뒤에는 푸른 하늘을 수채화로 담은 운하의 풍경이 펍에 오는 손님들은 반겼다. 아름다운 운하의 풍경을 안주삼아 좋은 친구들과 Marston's의 Pedigree맥주와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화이트 와인을 마시면서 오후를 보냈다. 펍에서 보낸 시간은 시험 걱정이 전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편했고 좋았다.
사람마다 각자의 힘들고 견뎌야 하는 시기가 있다. 학생에게는 시험기간, 취업 준비생에게는 취업 준비기간, 직장인에게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준비할 때가 가장 힘든 시기이다. 초조하고, 긴장되고, 걱정되고, 두렵고, 무섭고, 불안하고. 힘든 시기에 이런 감정을 잠시라도 떨쳐버릴 수 있는 과하지 않은 사소한 일탈을 힘든 시기에 잘 섞어줘야 한다. 조용한 시골이나 강변을 걷거나,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공연을 보거나, 커피 한 잔 마시면서 북카페에서 독립출판 책을 읽는 등등. 자신에게 잠시 여유를 줄 수 있는 사소한 일탈을 찾아야 한다. 나의 사소한 일탈은 새로운 펍에 가는 것이다. 한 시간이 걸려도 나에게 편안함을 주었던 영국 노팅엄의 한 시골 펍처럼. 당시 사소한 일탈을 하지 않았다면 5월은 더욱더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