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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ign Jul 18. 2016

가슴 적신 생수 한 병

타인의 친절함

다인이가 100일이 되어갈 무렵, 북경에 급히 갈 일이 생겼다. 한국에선 쉽게 중국 비자를 받을 수 있지만 밀라노에 살고 있는 이상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그러하듯 직접 중국비자센터를 찾아가 비자를 신청했다. 공교롭게도 다인이와 남편의 거주증(소죠르노카드)은 비자 신청에 부적합했다. 다인이의 거주증은 신청 상태였고, 남편은 갱신을 1달 남겨두고 있었는데 중국 비자를 받으려면 적어도 2달 이상의 기간이 남겨져 있어야 한다. 한국인의 경우 비자발급이 까다롭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서 일단 부닺혀보기로 했다. 행정직원들도 우리가 한국인이라 발급 조건이 까다롭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나에게 중국어를 할 줄 아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하니 영어나 중국어로 중국 영사관에 본인의 사정을 편지로 남겨보라고 한다. 정말 10년 만에 펜을 들어 중국어를 쓰기 시작했다. '아기는 엄마와 떨어질 수 없고, 거주증 신청 중입니다. 그 증거로 거주증 신청 딱지가 있습니다. 남편은 중국에 머무는 기간이 삼일뿐이 안되고 여기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거주증을 신청한다고 하면 앞으로도 두 달 정도가 더 걸려 거주증이 나옵니다. 급한 사정이 있으니 비자 발급을 허가해 주십시오.'. 기억나지 않는 글자들은 핸드폰을 이용해가며 베껴쓰기 시작했다. 착한 다인이는 아기띠 안에서 잘도 잤다. 상황이 이러하니 비자받는데 문제없을 것으로 본 나는 남편과 저가 비행기표 찾기에 돌입했다. 그리고 비행기표를 산 뒤 얼마 안지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비자 발부 거부. 그렇게 급하면 한국 가서 비자받고 중국 가란다. 환불을 받을 수 없는 비행기표. 돈은 돈대로 날리고 아이를 데리고 한국을 경유해 갈 생각을 하니 힘이 쭈욱 빠졌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다. 나의 긍정의 힘을 믿자. 중국비자센터에 맡겨둔 우리 가족의 여권을 찾으러 갔다. 우연인지 몰라도 딱 그날이 다인이 거주증을 신청하러 경찰서(퀘스투라) 가는 날이었다. 여권이 없으면 신청 못하는데 제 날짜에 가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물론 비자받고 난 뒤 거주증 신청하러 가도 문제없겠지만, 그 당시엔 아기띠를 매고 지하철을 타며 기관마다 돌아다니는 나의 불쌍함에 조금의 위로라도 줘야 했다. 그렇게 헐레벌떡 약속 시간에 맞춰 경찰서에 도착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정말 절대로 절대로 위로를 받지 못할 곳이라고 생각한 곳에서 나는 무너지고 말았다. 퀘스투라. 경찰서로 번역이 가능할진 모르겠지만 많이들 그렇게 쓴다. 이 곳은 이탈리아 사람들의 여권 발행, 외국인의 거주증 카드 관련 업무, 도난 범죄 신고 등의 일을 하는 곳이다. 거주증 카드가 없으면 불법 체류자이므로 외국인에게 있어선 중요한 기관 중 하나이다. 많은 외국인들이 두세 시간씩 줄을 서가며 카드를 기다리는 곳. 경찰관들이 싹수없게 홀대해도 묵묵히 참을 수밖에 없는 이 곳에서 내가 위로를 받다니! 밀라노도 아기와 임산부를 우선으로 여기는 유럽이었다. 우선 아기띠를 맨 나를 보더니 바로 들여보내 주었다. 임신 전엔 추운 겨울에도 밖에서 기다리라고 하던 그들이었다. 신청도 제일 먼저 받을 수 있게 줄 서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여보냈다. 땀을 흘리고 숨을 헐떡거리는 내 모습을 보면서 새로 부임한 젊은 경찰관이 (나는 지난 5년간 한 퀘스투라만 다녀서 담당 직원들의 얼굴을 다 알고 있다.) "숨 좀 천천히 쉬어봐. 힘든 것 같은데 물 좀 줄까?"라고 물어봤다. 당황스러웠다. 퀘스투라에서 이렇게 외국인에게 친절한 경찰관은 처음 보았다. 나는 물을 달라했고 그는 뒤에서 생수 한통을 가져와 내게 건네주었다.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아침부터 비자를 거부당했다는 안 좋은 소식을 듣고 100일도 안된 딸내미를 들쳐 매고 비자센터며 경찰서를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나.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힘들어도 품 속의 아기가 깨는 게 더 무서워 마음 졸였던 나. 이런 나를 정말 쌩 판 모르는 누군가가 위로해주는 것이다. 감사했다. 정신을 차리고 물을 마시며 아직 거주증 카드가 나오지 않은 다인이의 해외여행 시 주의사항에 대해 물어봤다. 더불어 나의 영주권 신청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새로 부임했는데도 서류에 대한 절차를 잘 알고 있어 궁금증이 싹 사라졌다. 그리고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퀘스투라를 나서며 나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져 있었고,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피상적 표현이 가슴으로 와 닿았다. 나도 타인에게 친절을 베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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