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섬 소나이의 제주섬이야기 Vol.12
그동안 잘 지냈나?
멀리서 고생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소식을 전하는 것도 진기한 경험이구먼.
사면이 답답하게 막힌 나의 좁은 방은 항상 춥다네.
유일하게 전면에 난 통창으로 나는 바깥세상과 소통하는데 그것도 간혹 기온이 습하거나,
찾는 이가 없으면 자욱한 성애로 말미암아 소통조차 쉽지 않다네.
내가 사는 곳은 싱싱한 횟감과 비린내가 공존하는
거저 평범한 동네 회집일세.
오늘도 사장 내외는 해가 떨어지기 전 가계 문을 열고 들어왔다네.
깜깜한 실내는 이내 실내조명으로 밝아지고
저녁 손님을 받기 위한 분주한 몸놀림은 일사불란하면서도
소리 없는 침묵으로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다네.
어제 새벽 늦게 되어서야 자리를 겨우 뜬 진상 손님들 탓에 사장 내외의 얼굴에는 피곤이
역력해 보여.
얼마 전 가계일을 도와주던 사장의 딸 내외가 첫 출산 이후라 일손이 모자란 탓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대충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나.
오늘은 싱싱한 돌돔과 구문쟁이, 다금바리가 수족관을 폼나게 채우지만 늘 그렇듯 주로 팔려 나가는 녀석들이 우럭이나 광어 수준이니 거래처 외상장부를 쳐다보는 사장의 입에서 깊은 한숨만
흘러나오는게 이제는 익숙한 풍경일세.
나의 피부색이 원체 맑다 보니 보통의 제주 토박이들은 나를 '하얀거'라 낮추어 부르지.
간혹 뭍에서 여행 온 객들은 '독한놈'이라며 추켜 새워 주기도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내 본연의 이름을 불러 줄 때가 제일 기분 좋은 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나.
간혹 다른 친구들은 피부색이 서로 비슷해서 구분이 쉽지 않다 보니 본연의 이름으로
불려지지만 뭐 이쯤은 아량으로 넘겨줄 수 있는 거지.
최근 제주섬에서 태어난 나와 유사한 피부색의 동료가 있어 요즘은 한결 덜 심심하다네.
물론 이 친구들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나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법정다툼까지 벌였지만 어찌
되었건 반가운 친구들이니 사이좋게 지낼
생각이네.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이면 사장 내외의 한숨은 더 깊어지기 마련이지.
과거 수족관 시설이 마땅치 않은 시절에 자칫 부패한 생선을 날것으로 먹다가 탈이 나는 경우가 더러 있던지라 그 시절에 생겨난 오해라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비 오는 날 횟감을 꺼려하는 현실 속에서 사장 내외는 별다른 대책이 없어 보인다네.
그저 오늘 가계세나 벌었으면 하는 심정이 내게도 전해져 오는게 마음이 영 편치를 않네.
그런데 한동안 뜸했던 단골 사람이 처음 보는 일행들과 오늘 첫 손님으로 입장하네 그려.
내가 저 인간을 기억하는 건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지.
저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오로지 나만 죽기 살기로 찾거든.
원래 서울 출신이면서 전국구인 그 친구를 더 좋아했던 인간인데 꼴에 제주에 터 잡은지 몇
년 째라며 이제는 나 같은 귀하신 몸이 아니고는 상대를 하지 않으려 한다네. 하하!
그런데 같이 온 일행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이며 주문하는 모양새가 딱 들어도 제주사람이 아니구먼.
대게의 토박이들은 나를 부를 때 '하얀거 시원한거' 또는 '하얀거 전기먹은거'
아니면 '하얀거 노지꺼' 이렇게 부르는데 저 인간의 일행들은 나의 이름도 모르거니와
여느 순하디 순한 정체성 없는 다른 녀석들과
같이 도매급으로 나를 취급하고 있으니 말이지.
"야~잇. 이 인간들아! 난 아직 그래도 20도를 넘는 정체성을 지키고 있단 말이지.
어디 감히 과실주인지 음료수인지도 모를 그 딴 친구 놈들과 비교를 하고 그래."
그래도 내가 저 인간이 좋은 이유가 있는지라, 그 일행들의 오만불손함을 과감히 용서해 줄 생각이네.
저 인간은 평소에는 우럭만 즐겨 먹는 구두쇤데,
그래도 간혹 귀한 손님들을 데리고 오면 돌돔 같은 귀하신 몸들을 찾기는 하지. 물론 자기돈 낼땐 어김없이 구두쇠지만...
내가 엄밀히 볼때 술 좋아하는 폼새며, 회맛도 즐길 줄 아는게 영 염치없는 족속은 아니니 분명 주인 아주머니의 특별 안주가 서비스 될 공산이 크다고 보네.
"이 인간들아 뭔 술을 그리 급하게 마셔?"
내가 잔소리 한마디 하려 치는데,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등장하는구먼.
노르웨이산 냉동이 아닌 살아있는 생 고등어구이!
나도 정말 좋아할 것 같은데 지금껏 한 번도 맛을 보지 못했다네.
정말 비린맛이 하나도 나지 않는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 저 일행들의 외침에 나까지 군침 돌게 만드는 게 미쳐버리겠네 정말.
"썩을 놈들..."
아는 사람들은 다아는 사실이지만
제주섬에는 식당 같은데를 가보면 나를 위시한 동료들이 갑갑하고 추운 방안에만 모셔져 있지를 않고 가지런히 바깥 진열장에 모셔져 있는 걸 보았을 것이야.
여기 제주섬 토박이들 중에 술좀 한다 하는 이들은
가끔 이 귀하신 몸을 날것 그대로 좋아한다 말이지.
심지어 삼복더위에도 아랑곳 않는 부류들은 입신의 경지라고나 할까?
꽤 혼란스러울 텐데 그들의 넋두리는 그래서 덜 마시게 된다는 괴변에 가까운 논리로 포장되어 있어.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주류회사들이 과거 식당에 주류를 납품하면서 제공하게 되는 냉장고를 많이 배치할 여력이 안되다 보니
생겨난 억측이 아닐까 추측해보는데,
어찌 되었건 많은 이들의 애환과 삶을 가까이서 들어 볼 수 있어서 좋기는 하다네.
간혹 육지에 사는 다른 동료들 소식을 듣자 하니,
심지어 살얼음까지 생길 정도로 초주검을 만든다 하니 어이구! 생각만 해도 끔찍할세.
아! 그리고 자네는 어떠한지 모르지만,
내 몸통에는 공장에서 '증류식소주'라고 떡하니 붙여 놓았는데,
이 때문에 토박이들은 나를 귀한 선배님들 처럼 증류주라고들 하면서 뭣모르는 육지사람들에게 얘기한다고 들었다네.
솔직히 말하자면 어차피 자네나 나나 우리 모두 희석주 아닌가.
주정도 다 육지에서 오는것이고 말이지.
그런데도 무지몽매한 이들이 나를 추켜세우니 몸 둘 바를 모를지경이네.
다만 산 좋고 물 좋은 이곳에서 태어난 관계로 자존심은 분명 있으니 그것 만큼은 질투하지 말게나.
그리고 혹여 그 얘기 들어보았는가?
제주섬이 전국에서 인구 대비 술소비량이 가장 많은 지역 중 하나라고 떠들어대지 않던가 말일세.
그게 나 같은 잘난 놈이 있는 탓도 있겠지만,
벼르고 온 제주섬 여행에서 어디 소주 한잔 걸치지 않으면 그게 여행이겠나 말일세.
내가 이 횟집에서 기거하면서 어림짐작 보아도 토박이들보다 여행객들이 더 먹으면 더 먹었지 덜 먹지는 않더라는 말일세.
토박이들이 맨날 술만 먹고 산다는 오해는 없었으면 해서 건네는 말일세.
물론 1차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날씨가 궂을 땐 술 한잔하며 하루를 보내기도 할 테지.
여가생활이 다양하지 않다 보니 그러한 연유도 일정 부분 기인할 테고.
아무리 괸당 문화고 어쩌고 해도 예전처럼 부어라 마셔라 하는 토박이들이 많이 사라진 것을 느낀다네.
좀 더 재미난 얘기를 많이 들려주려 했지만,
다음에 기회 있을 때 또 소식 전함세.
저 인간 본새를 보아하니 오늘 우리 방 식구들 모두 거들 낼 본새야.
같이 자리한 저 인간 일행들이 우리 동료들을 야금야금 먹어치우고 있어.
주인장 아주머니가 흐뭇하게 매운탕을 만들고 계시는 걸 보니 적어도 내 차례가 얼마 남지 않은 듯 허이.
이다음 생애에는 추운 방에 갇히지 않고, 노지 진열장에 앉아 행복한 수다들이나 실컷 들어볼 작정이네.
자네도 혹여 아는가? 멀리 배 타고 와서 나랑 같이 노지 진열장에서 이웃할 수 있는 우연이 있을는지도 말이지.
앗! 저 인간이 주인장에게 드디어 나를 불러들였어.
이만 안녕일세~.
2016년 모월에 라산이가 이슬이에게 씀.
"사장님! 여기 하얀거 시~원한 거 한 병 더 주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