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단편 : 아날로그의 기억
"소대장! 지금 적들이 저기 정철이네 벽 모퉁이에 숨어있어."
"내가 망을 볼 테니 너, 너 둘이서 창수네 집 쪽으로 들어가서 기다리는 거야. 알았지?"
"알았다. 오바~"
이윽고 어둠 속 골목길은 팽팽한 전운이 감돌았다.
일촉즉발의 긴장 속에서 재빠른 부하 2명이 어둠 속에서 다음 공격포인트로 숨죽여 이동했다.
행여 철모가 벗겨지면 적들에게 노출되어질 터이다.
한 손은 철모를 누르고, 한 손에는 버거운 무게의 기관총을 들고서도 그들은 몸놀림이 재빨랐다.
창수네 집 대문 안에는 자그마한 똥개 한 마리가 있었는데, 익히 얼굴을 터놓은지라 짖지도 않고 꼬리만 흔들었다.
이제 소대장의 신호만 떨어지면 오늘의 전투를
마무리할 기습공격이 감행될 찰나였다.
"창훈아~~~. 밥 무로 온나!"
"야~잇! 정철이 이놈아. 바가지 또 들고갔제. 퍼뜩 들고 집에
안 들어올래. 이놈의 시끼 오늘 아부지인데 혼 좀 날래?"
그날의 전투는 갑작스런 강대국의 개입으로 흐지부지 결말을 못본채 그렇게 끝이 나버렸다.
적과의 거리가 채 10여 미터도 남겨두지 않았으니
한 손에 들려진 26연발 따발총이면
전투는 우리 측의 승리나 진배없었다.
골목길만큼은 포장이 채 되지 않았던 터라
무릎 여기저기는 전투의 상흔이 늘 있었다.
까지고 딱지않고 또 까지고...
이땐 막내의 집에 상비하는 구급약이 있었으니
빨간 아까쟁끼와 안티푸라민이면 모든 상흔은 치료되었다.
까진 상처에도, 입술튼곳에도, 어른들 삐끗한 곳에도 그 시절의 가정상비약은 효과 만점이었다.
그날의 전투가 치열했던 탓에
가냘픈 전사의 온몸은 땀에 절어 있었고,
시원한 우물가 등목은 그래서 더욱 시원했다.
밥상은 늘 소박했지만 온가족이 둘러앉아 먹던 여름날의 저녁밥상은 여느 진수성찬 부럽지 않았다.
오랜만에 상에 올라온 고등어구이는 연탄불 석쇠에 노릇노릇 구워져 밥상 위에 차려졌고,
아버지는 한 젓가락 툭 떼서 막내의 밥 위에 척 올려 주셨다.
늘 그랬지만 어머님은 늘 살점 없는 꼬랑지와 대가리만 드시면서도 '어두육미'라며 그나마도 손으로 빈약한 살을 발라내어
철없는 막내의 밥숟갈 위에 또 한점 올려 주셨다.
막내는 오늘 전투가 못내 아쉬웠지만,
고등어구이를 먹은 것에 만족했다.
여름밤 동네 집 대문 앞과 옥상들이 있는 집 위에는
대게 평상 마루가 있었는데 곱게 장판까지 덧 씌운 채 여름날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요즘의 거실 소파 구실이었을까?
하여간 여름밤의 모기는 예나 지금이나 독했던 것 같다.
평상 마루 밑에는 그날도 모기향이 피워졌고,
아버지의 못질 몇 번에 멋진 모기장이 마루 위에
펼쳐졌다. 백열전구를 끌어다 조명까지 마루 옆 벽에 걸고 나면 그곳이 곧 여름밤의 안방이었다.
예의 그 시간쯤이면 라디오에서는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전설따라~ 삼천리~"
이름 모를 아저씨가 잔잔한 시그널 음악을 배경으로 전설따라 삼천리를 외치면 막내는 귀가 솔깃하여 이야기에 집중했다.
어머니의 따뜻하고 푹신한 무릎베개에 파묻혀 온가족과 함께 듣던 무시무시했던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 이야기는 막내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고,
바늘과 망치로 잘게 쪼갠 얼음덩어리에 녹아든 삼성당표 수박화채는 더욱 소름을 돋게 했다.
막내는 구미호가 나타날까 겁이 나서
더욱더 어머니의 품속으로 파고 들어갔는데
그 품속이 얼마나 따스했던지 아직도 기억이 선하다.
금세라도 우물 속에서 흰소복 차림의 귀신이 스르르 올라올까 겁이 나서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는 애써 내일 다시 있을 전투 생각을 했다.
한여름밤 동네 남정네들은 난닝구차림에 대문 앞
평상이 안방인 양 잠을 청했고,
미처 잠들지 못한 창훈이네 아버지의 라디오에서는
밤 깊은 애국가가 흘러나오고 통금 사이렌이 울렸다.
밤하늘 별들은 하나님이 보우하사 초롱초롱 영롱했다.
꼬마 전사들은 내일의 치열한 전투를 걱정했을까?
아니면 창수가 다 따먹고 쓸어간 구슬을 다시 찾아올 묘수를 생각했을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막내의 형은 그 시절 이미
고등학교를 다녔고, 휴대용 전축을 들고 다니며 또래들과 고고댄스를 췄다.
'별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 해변으로 가요~'
한여름밤 라디오에서는 해변을 구경해 본적이 없는 막내에게 해변으로 가자고 조르고 있었다.
동네에는 아이스크림 콘에 사용되는 콘(고깔 모양)만을 만드는
공장이 하나 있었는데 당시 몇십원이면 한 바가지를 사 먹을 수 있었다.
내일이면 막내는 창수와 중요한 빅딜을 해야 한다.
창수가 이놈 저놈에게서 쓸어간 왕구슬과
나무로 뚝딱뚝딱 멋지게 만들어진 26연발 따발총을 적당히 교환하고,
그래도 따발총이 비싸게 값어치를 하는 고로 철모를 들고 가서 고깔과자를
한 바가지 사 먹자고 협상할 요량이다.
마음 좋은 창수는 분명 막내의 제안을 받아 들일터였다.
왜냐하면 막내가 가진 따발총은 근자에 보기 드문 니스칠까지 된
멋진 26연발 따발총이었기 때문이다.(26연발은 이름만 26연발이다.)
그것도 손재주 좋으신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 주신 따발총이기 때문에 더욱 가능성 있는 제안이었다.
막내로서도 손해 볼 것 없는 딜임에는 분명했다.
따발총이야 아버지가 또 만들어 주실 것이므로...
'전설따라 삼천리'의 시그널 음악이
드비쉬의 '아라베스크'라는 음악이었음을 얼마 전에야 알았다.
성우의 목소리가 없는 음악만 들어도 막내는 그 시절의 추억이
요란하게 떠올랐다.
이제 26 연발 따발총을 만들어줄 아버지도,
고등어구이 살점을 손수 발라주시던 어머니도
이제는 아날로그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그 시절 '전설따라 삼천리'가 단 몇 편만이라도 음원이나 CD로 판매된다면 아마도 막내가 가장 첫 번째 구매 고객이 되지 않을까 싶다.
"눈물 나게 그리운 아날로그의 기억 때문에 말이지 말입니다."
몇해 뒤 흑백테레비 반공드라마 '전우'에서 막내의 우상이었던
나시찬소대장은 적군의 총탄에 작렬하게 전사했다.
그날 막내는 세상이 무너지는듯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쏟아냈다.
'별넷'이란 남성가수들이 부른 '전우'의 주제곡은 막내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음악이었으며, 곧잘 따라 불렀다.
#구름이 간~다. 하늘도 흐~른다. 피 끓는 병사들도 전선을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