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소나이의 제주섬이야기 Vol.5
올해로 68주년을 맞게 되는 제주 4.3 사건.
일제로부터 해방된 기쁨도 잠시였던 그시기...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 좌와 우가 극심히 대립하고, 아무것도 모르던 그저 순박했던 섬사람들 수만명 이 억울하게 죽어나갔던 1948년부터1954년까지
를 우리는 통칭해서 제주 4.3 사건으로 부르고 있다.
이야기를 꺼내기 조차 가슴 시린 이야기!
그러나 제주섬을 이야기하기에 꼭 짚어봐야만 했던 제주섬의 감추어진 가슴속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여미어 보고 지나가려 한다.
이제 곧 겨울바람이 스쳐간 그 자리에 어김없이 색 노란 유채꽃들과 개나리들이 화사한 봄내음을 들려줄 때이다.
올레 19길... 김녕에서 조천까지 이어지는 그 길 한 중간에는 '너븐숭이 4.3 기념관'이 있다.
무엇을 기념하는지는 몰라도, 왜 '기념'이라는 단어를 쓰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그곳에는
우리가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이유가 조용하고도 엄숙하게 자리하고 있다.
제주 4.3에 대해 의외로 많은 이들이 그 내용을 깊이 있게 알고 있지 못하다.
4.3은 반란이냐, 항쟁이냐의 논쟁이 좌와 우의 대립만큼이나 극명하다.
그래서 오늘날 4.3은 그냥 제주 4.3 사건으로 통칭되고 있다.
36년간 일제 치하에서 온갖 착취와 압박 속에서 어찌하여 해방은 맞았으나, 나라의 기틀이 잡히지
않은 그때 남과 북은 소련과 미국이 서로 개입하여 정권을 담당했다.
이른바 미군정시대였으며, 제주섬은 남한에서도 그 세력이 깊숙이 자리했던 남로당의 주요
활동지였던 시기였다. 이에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반공산당 조직이었던 서북청년단 등을 동원, 군경토벌대를 조직하고 제주섬에서의 대대적인 무장폭도 토벌작전을 단행했으며 이때 무고한제주 섬사람들 3만여 명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사건이다.
그 아픈 과거의 핵심은 나라 잃은 설움이었으며, 다시 찾은 나라를 온전하게 우리 스스로 지켜내지
못한 과오이기도 했으며, 결국 우리 민족끼리 강대국의 논리와 이념에 갇혀 서로 총부리와 죽창으로 죽이고 죽이게 된 대한민국의 슬픈 역사의 과오다.
이러한 아픈 과거사에서도 유독 필자는 제주의 4.3 사건에 대해 가슴 시린 이유가 있다.
전쟁 중도 아니었으며, 오로지 시국의 소용돌이로 인해 제주섬 내 70여 개 마을이 불타 없어지고
이념이 무엇인지도 알턱 없던 그들이 폭도로 몰려 희생당한 숫자만 3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아수라장이었던 그 현장이 까마득했던 옛날도 아니고 불과 반세기 전의 우리 현대사라는 점이다.
과거 정부는 쉬쉬했고, 피해 당사자 유족들은 입을 다물고 가슴으로 울어야 했다.
그들은 억울해도 억울하다 하소연하지 못했다. 빨갱이와 폭도로 오인될게 겁이 나서 그렇게 반세기를 가슴에 묻었다.
억울하게 남은 자들은 연좌제라는 또 다른 굴레에 얽매여 그 후손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번번한 공무원 시험 한번 도전하지 못했으니 어찌 그 속내가 편할까.
4.3 발발 후 전란이 터지자 빨갱이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는 군대에 자원하는 거였다. 초창기 해병대가 이렇게 제주섬 출신 청년3만명을 주축으로 탄생했다.
이북출신인 서북청년단에게 당한 이들이 이북사람에게 돌려주고 싶었던 것은 불타오르는
적개심이었을런지도 모른다.
섬출신 토벌대는 한다리 건너면 폭도와 알 수 있는 처지인지라 토벌대는 육지인력으로 대체 되었다. 육지것들은 그렇게 서슬퍼랬고, 섬것을 아래로 흘기고 마구잡이로 좌익시했다.
가시리 한신화(96) 할머니는 그때 고문으로 손가락이 구부러져 사셨다.
"나를 찾아오라. 한라산아~ 아이를 찾아주렴~" 난리통에 네살배기를 보낸 할머니의 한은
누가 풀어줄 수 있겠는가?
총탄에 턱이 사라져 평생을 무명천으로 얼굴을 감싸신 무명천 할머니의 아픔은 또 누가 달래 줄 수 있을까?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곳에 제주섬이 있었다.
한 여자가 울담 아래 쪼그려 있네
손바닥 선인장처럼 앉아 있네
희디 흰 무명천 턱을 싸맨 채
울음이 소리가 되고 소리가 울음이 되는
그녀, 끅끅 막힌 목젖의 음운 나는 알 수 없네
가슴뼈로 후둑이는 그녀의 울음 난 알 수 없네
무자년 그날, 살려고 후다닥 내달린 밭담 안에서
누가 날렸는지 모를
날카로운 한 발에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턱
당해보지 않은 나는 알 수가 없네
그 고통 속에 허구한 밤 뒤채이는
어둠을 본 적 없는 나는 알 수 없네
링거를 맞지 않고는 잠들 수 없는
그녀 몸의 소리를
모든 말은 부호처럼 날아가 비명횡사하고
모든 꿈은 먼 바다로 가 꽂히고
어둠이 깊을수록 통증은 깊어지네
홀로 헛것들과 싸우며 새벽을 기다리던
그래 본 적 없는 나는
그 깊은 고통을 진정 알 길 없네
그녀 딛는 곳마다 헛딛는 말들을 할 수 있다고
바다 새가 꾸륵대고 있네
지금 대명천지 훌훌 자물쇠 벗기는
베롱한 세상
한 세상 왔다지만
꽁꽁 자물쇠 채운 문전에서
한 여자가 슬픈 눈 비린 저녁놀에 얼굴 묻네
오늘도 희디흰 무명천 받치고
울담 아래 앉아 있네
한 여자가
'무명천 할머니' - 허영선
4.3 당시 제주섬 어느 곳 하나 피해를 입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그중에서도 북촌은 그 한가운데에
있다.
1949년 1월 17일 오전 11시.
2개 소대규모의 무장 군인들이 북촌마을에 도착하여 현재의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마을주민
천여 명을 집결시켰다.
이윽고 300여 채가 옹기종기 모인 마을 가옥들은 군인들에 의해 불타기 시작했으며, 군경가족을
제외시킨 나머지 주민들은 50여 명, 100여 명씩 어디론가 무리 지어 초등학교 인근으로 끌려갔다.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제주섬 북촌마을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어나갔다.
직계가족이 군경이었던 일부는 그렇게 죽음을 모면했다.
'킬링필드'가 어찌 이역만리 타국만의 이야기이던가?
2 연대 3 대대 군인 2명이 폭도에 의해 습격 피살당한 이유 치고는 너무 참혹했다.
젖먹이 애기는 군인의 총탄에 쓰러진 엄마의 젖꼭지를 놓으려 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 479명이 이날 폭도들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무참히 떠나갔다.
4.3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자면 이야기가 길어진다.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는 불편하게도 이러한 팩트를 감추고만 있다.
최근 개봉한 '귀향'이란 영화도 결국 불편한 우리의 아픈 과거사이며,
4.3은 어찌 보면 그 연장선상에 다름 아니다.
4.3 평화공원에 모셔진 위패 중 50여 위에 대해 유족단체에서는 당시 '폭도'였던 반체제 인사들이 섞여 있다고 해서 국가 진상조사위에 의뢰를 해놓은 상태이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며, 우리 이웃의 아픔이고 속살이다.
그때 죽창을 휘두르고 총부리를 겨누었던 그들이 지금은 조용히 서로를 이웃하며 제주섬에 살고들 있다.
일명 '북촌리 학살사건'이 온전히 다루어진 것은 불과 80년대 중후반의 일이다.
'순이삼촌'으로 알려진 북촌 학살사건은 초판이 인쇄된 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작가 현기영 선생이 보안부대에서 고문을 받을 만큼 금기시되고 말하면 안 되는 아픔이었다.
빨갱이 섬으로 낙인 되어 자행되었던 온갖 희생은 낮에는 토벌대에 의해, 어둑한 밤이면
폭도에 의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불쌍하고 애잔한 뭇 제주 양민들을 울게 했다.
졸지에 남자가 없는 '무남촌(無男村)'이 되어 버린게 어디 북촌만이겠는가?
여자가 많은 섬이 되어 버린 제주섬에는 그렇게 토착민들의 아픔이 함께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너븐숭이, 당팟밭,탯질,갯수왓 등지에서 시신을 수습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과정에서 일부 어린아이들은 당시 임시 매장했던 상태로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애기무덤'
봉분도 없는 20 여기의 자그마한 돌무덤은 2001년 북제주군 소공원 조성사업으로
부지를 정리하면서 가시덤불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20 여기 모두를 당시 희생자로
보기는 어렵다고는 하나 최소 8기 이상 정도는 당시 희생자로 보고 있다.
지금도 북촌에서는 음력 12월 19일을 전후해서 마을 거의가 제사 집이다.
한집 건너 제사를 모시니 이 또한 기가 막힐 노릇이다. 변변한 위령제를 모신게 불과
2000년대 들어와서다.
올레 19길을 걸을 때 애기무덤터에 놓인 나그네들의 마음을 보았다.
누군가가 고이 올려놓고 간듯한 장난감, 양말 한 켤레, 털모자며...
먼길 아기 영령들이 가시는 길에 춥고 심심하지 말라며 올려놓은
애기무덤위의 그것들은 가슴속으로 한 발짝 더 다가온 제주섬 속살이었다.
한라영산이 푸르게
푸르게 지켜보는 조천읍 북촌 마을
4.3사태때 군인 한두 명 다쳤다고
마을 사람 모두 불러 모아 무차별 난사했던
총부리 서슬이 아직도 남아 있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너븐숭이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아직 눈도 떠보지 못한 아기들일까
제대로 묻어주지도 못한
어머니의 한도 함께 묻힌 애기 돌무덤
사람이 죽으면
흙속에 묻히는 줄로만 알았던 우리 눈에는
너무 낯선 돌무덤 앞에
목이 메인다.
목이 메인다.
누가 이 주검을 위해
한 줌 흙조차 허락하지 않았을까
누가 이 아기의 무덤에
흙 한 줌 뿌릴 시간마저 뺏아 갔을까
돌 무더기 속에 곱게 삭아 내렸을
그 어린 영혼
구천을 떠도는 어린 영혼앞에
두손을 모은다
용서를 빈다
제발 이 살아 있는 우리들을 용서하소서
용서를 빌고
또 빈다.
'애기돌무덤 앞에서' - 양영길 시인
"아주 멸족당했어. 사돈의 팔촌까지 그렇게 됐다니까. 이 애기무덤이 바로 '산사람(폭도)'손자의 무덤이란 말야. 이 시신을 건드렸다가는 산사람으로 취급당할까 봐 아무도 손 못 대고 내버리니까 밭 임자가
흙을 몇 삽 떠가지고 묻어준 게 이게 그대로 있는 거여" - 4.3희생자유족회 조천읍지회 이재후 회장님
너븐숭이쉼터 바로 옆에 보면 200여 평의 마늘밭이 하나 있다. 그 밭 가운데쯤에 잡초가 우거져 있는데, 그것도 애기무덤이라고 한다. 반세기동안 밭주인은 애기무덤을 그대로 두고 있다. 그렇게도 제주 섬사람들에서 4.3은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간직해야만 하는 아프고 시린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