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풍 박석준 Aug 03. 2020

빨강팬티

   학원을 정리하고 할 일을 찾고 있던 아내는 명리학(命理學)을 배우기 시작했다. 학원을 운영하면서 많은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왔던 터라, 평소 사람의 타고 난 속성과 운명에 많은 관심을 보여 왔고, 십여 년 만에 찾아온 시간적인 여유가 공부하도록 만든 듯했다. 아내의 첫 번째 탐구대상은 내 사주(四柱)였다. 

  전반적으로 사주는 좋은데, 운이 초년에 들어왔기 때문에 앞으로 출세를 위해서는 좋은 기운을 많이 북돋아 주어야 한다고 풀이했다. 특히 모자라는 물기운(水)을 보충해줘야 한다면서 화분도 수련, 부레옥잠 같은 수생식물이 자라는 수반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심지어 붉은색이 사주에 어울린다고 붉은색 계통의 넥타이를 매고 다니라고 말하더니, 결국엔 빨강팬티 까지 사다 주는 것이었다.

  아내의 말에 따라 붉은 넥타이는 주저 없이 매기 시작했다. 그러나 속옷은 선뜻 내키지 않았다. 붉은색이 행운을 가져다주는 색깔이라고 해도, 옅은 색 속옷이 전부였던 나로서는 빨강팬티에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빨강 속옷과의 첫 인연은 첫 직장에서 첫 월급 탔을 때였다. 왜 빨강내복을 선물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도 못한 채 어머니께 빨강내복을 사다 드렸다. 그렇게 해야 직장생활이 원활하고, 승승장구할 수 있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었다. 빨강 속옷과의 대면이 처음이 아니었다고 해도 빨강팬티를 입고 다니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마도 김민정의 시 ‘빨강에 고하다’에서 표현한 것처럼 빨강팬티는 여자가 매직이 걸린 날 입는 속옷으로 남자는 눈길을 주지 말아야 할 것 물건이라는 점과 색의 이미지가 너무 에로틱했기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네가 손만 잡고 잠만 자자고 했다

 네가 아는 내 애인이 고해성사를 한 직후였다

 Eli Eli Lesma Sabachtani!

 코 골며 꿈속으로 나자빠진 줄 알았는데

 왜 자꾸 내 이름은 부른다니?

 빨강팬티에다 나는 날개형 화이트를 대고 있었고

 화장실 변기 위에 나는 오래 저린 엉덩이였다

 미안해, 생리 중이야!’

 <김민정 시집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에서 인용> 

    

  빨강팬티 입기를 주저하는 내 모습을 본 아내는 빨강팬티 사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아느냐고 하면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땐 반드시 입고 가라고 재차 강요했다. 아내의 잔소리에 떠밀려 중요한 협상이나 계약이 있을 때면 샤워를 하고, 붉은색이 많이 들어간 넥타이와 함께 빨강팬티를 의도적으로 챙겨 입기 시작했다. 어머니께 드린 빨강내복과 입기를 강요받은 빨강팬티는 어찌 되었든 내 속에 있던 타오르는 욕망과 끈끈하게 연결된 것이었다.

  그해 가을, 어렵게 계약에 성공한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워크숍 자리에서, 일하는 데 있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며 사소한 것이라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강조하는 말끝에 붉은색과 나의 관계를 이야기했다. 물론 그 빨강팬티를 입고 갔었다는 사실까지.

   워크숍이 끝난 지 한 달쯤 되었을까? 지방에 근무하는 한 직원이 사무실로 찾아왔다. 이번엔 꼭 임원으로 승진하라는 말과 함께 조그만 상자 한 개를 내놓는 것이었다. 이것을 구하기 위해 시내 상점을 다 찾아 헤매고 다녔다고 하면서, 매일 입고 다니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집에 와서 상자를 열어보니, 색깔도 선명한 빨강팬티 다섯 장이었다. 다음 날부터 내가 입는 팬티는 빨강으로 바뀌어 있었다. 몇 주가 지난 후, 회사의 별이라고 불리는 임원 승진명단에 내 이름 석 자가 실렸다. 직원이 사다 준 빨강팬티가 아내의 말처럼 좋은 일을 가져온 것이었다. 

  십여 년이 지난 요즘도 중요한 행사나 일이 있을 때면 빨강팬티를 챙겨 입는다. 여자들의 전유물로 생각되어 얼굴을 붉혔던 빨강팬티가 어느새 내 애호품이 된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동백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