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사람이 읽은 책은 어떻게 만들고, 어떤 이유로 귀하게 되었을까? 구텐베르크가 만든 금속활자는 서양 사회에 거대한 사회적, 문화적 변화를 일으켰다. 이와는 달리 금속활자를 세계최초로 발명한 우리나라는 고려, 조선 시대에 걸쳐 눈에 띄는 변화나 발전이 없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지식 독점을 무너뜨림으로써 중세를 붕괴시키고, 사회에 거대한 변화를 일으켰지만, 우리 금속활자는 오히려 기존 질서를 고착시키는 쪽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학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조선 시대의 출판은 대부분 관(官) 주도하에 국가이념, 즉 유교 이념을 전파하는 매체로서 성격이 강했다. 이렇게 출판되는 책도 주로 고위관리와 양반에게만 배포되었기 때문에 생산과 유통이 제한적이고 폐쇄적이었다. 유교 이념을 국가의 기본으로 삼은 조선은 백성을 교화시키는 수단으로만 출판을 활용했다. 관 주도로 출판된 서적을 관판본(官板本)이라고 부르고, 교서관(校書館)이 출판을 담당한 대표적인 중앙관청이었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 책값은 얼마 정도였을까? ‘중종실록(중종 24년, 5월 25일)’에는 다음과 같이 ‘어득강’의 말이 실려 있다. ‘外方之儒, 雖有志於學, 以無書冊, 不能讀書者, 亦多有之. 其窮乏者, 不能辦價買冊, 而雖或有辦價者, 如 中庸, 大學 亦給常緜布四三匹買之, 價重如此, 故不能買之’, ‘지방에 있는 유생 중에는 비록 학문에 뜻이 있지만, 서책이 없어 독서를 하지 못하는 사람도 또한 많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책값을 마련할 수 없어 책을 사지 못하고, 혹 값을 마련할 수 있다 해도 ‘대학’이나 ‘중용’ 같은 책은 상면포(常綿布) 3~4필은 주어야 살 수 있습니다. 값이 이처럼 비싸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요즘 화폐로 책값을 추정해 보자. 조선 시대 면포 서너 필은 쌀 두 가마 값에 해당했다고 한다. 요즘 쌀 한 가마(80kg) 가격이 이십만 원 정도인 점을 고려하면, 조선 시대 책 한 권 값은 무려 사십만 원에 이른다. 2009년에 고려원북스에서 발행한 ‘대학, 중용’의 경우, 번역문과 원문을 합쳐 411쪽인데도 만 삼천 원이었다. 강명관의 ‘조선 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에 따르면 영조 때 인쇄, 보급된 ‘대학’과 ‘중용’은 각각 178면, 294면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조선 시대 책은 고가의 보물인 셈이었다.
조선 시대 책값이 비싼 이유는 고가의 종이와 활자, 인쇄기술자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책을 출판하려면 금속활자, 목활자, 목판제작이 이루어져야 한다.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한자(漢字)로 쓰인 책 한 권을 만들려면 한자 수만큼 활자가 있어야 한다. 한 번 주조 때마다 십만 자를 넘기기 일쑤였다고 한다. 금속활자는 구리와 철로 만드는데, 이를 구하는 것 자체가 국가기관이나 왕실 또는 돈 많은 가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종잇값 또한 활자나 목판제작 비용과 맞먹어 책 출판을 어렵게 했다. 출판에 필요한 모든 재료가 구비 되었다고 해도 활자를 주조하고, 판목을 새기며, 이를 종이에 찍어 낼 인쇄기술 장인이 필요했다. 이런 장인은 관청에 소속된 천민 신분이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고용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런 막대한 출판 비용과 장인 동원의 어려움 때문에 국가기관에서 활자를 만들고 책을 출판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국가가 인쇄, 출판을 담당함으로써 지식을 공급하는 유통 주체가 되었다. 어떤 책을 찍어 배포할 것인가는 오로지 왕과 관료가 결정했다. 책의 인쇄와 출판을 국가가 독점함으로써 민간에서의 인쇄, 출판, 유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책값은 일반 백성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 새 책을 구매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남의 책을 빌려 필사하거나, 활자본인 책을 한 장씩 뜯어내 이를 목판에 붙인 다음, 글자를 새겨 판본을 제작, 배포하기도 했다. 금속활자로 인쇄된 서적이 드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이웃 나라 일본은 어땠을까. 조선 후기에 해당하는 에도시대 일본에서는 책의 출판과 유통이 민간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고 간 인쇄 및 종이 기술자가 있었고, 서양문물에 대한 객관적인 접근이 가능했던 난학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조선 영조 시대인 1774년, 일본은 서양 해부학책 ‘해체신서’를 번역하여 출판했다. 영조와 신하들이 이 책을 보았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로부터 100년 후, 조선은 외세 열강에 시달리며 쇠락의 길을 걷고, 일본은 근대화의 길로 들어섰다. 일본의 근대화 성공 바탕에는 다양한 지식의 흡수와 전파를 가능하게 한 활발한 책의 출판과 유통이 자리 잡고 있다. 1863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이 이십만 부 이상 발행되었다는 것은 지식의 유통이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의 제작과 유통이란 측면에서 당시 조선은 일본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조선 후기 문인 ‘이덕무’는 책에 해선 안 될 행동으로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지 말라, 손톱으로 줄을 긋지 말라, 먼지떨이처럼 창과 벽에 휘둘러 치면 안 된다.’라고 했다. 이것은 책이 마음의 양식이니 귀하게 다루라는 뜻 이면에 책이 너무 비싸고 귀해 보물처럼 여길 수밖에 없는 현실을 나타낸 것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서양 사회에 거대한 변화를 일으킨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와 달리 우리의 금속활자는 세계최초라는 것 이외에 자랑할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지식 독점을 무너뜨리지도, 다양한 출판과 활발한 유통을 이루지도 못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옛날 책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