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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풍 박석준 Oct 23. 2020

가을이 익는다

  해 질 무렵 산에 오른다. 집을 나서면 쉽게 갈 수 있고, 사람이 붐비지 않은 산이다. 생강나무 꽃이 활짝 필 때든, 눈발이 꽃잎처럼 휘날릴 때든 언제나 좋다. 나무 사이로 난 한적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거친 숨소리가 발소리에 실려 귀를 어지럽힌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쯤 산꼭대기에 다다르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다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본다. 

  펄펄 끓는 삼복에 서늘한 그늘을 만들어 주던 신갈나무 사이로 붉게 물든 단풍잎이 보인다. 산 아래 남쪽 호조벌이 어느새 누렇게 변했다. 구름과 노을이 만든 붉은 파노라마가 소래포구 앞에 펼쳐진다. 순식간에 온 사방이 가을빛에 물들어 버린다. 지난여름 열기를 식히기 위해서인지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동안 가을빛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마음의 여유가 없던 탓이다. 예전과 다르게 가을빛이 보이는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을을 ‘익는다, 깊어 간다.’라고 흔히 말한다. 다른 계절은 ‘겨울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봄이 절정에 다다랐다. 펄펄 끓는 여름이다’라고 단순히 몸이 느끼는 감각만으로 표현한다. 왜 가을을 ‘익는다, 깊어 간다.’라고 이야기할까. 

  무엇이 익으려면 상당한 열이 가해져야 한다. 따뜻한 정도가 아니라, 비명을 지르며 손을 거둬 드릴, 데일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있어야 한다. 가을이 익는다는 것은 만물이 교접하는 봄의 절정을 거쳐 펄펄 끓는 여름을 겪었기 때문이다. 머리로 생각해서 찾아낸 말이 아니다. 몸이 겪은 바를 그대로 나타낸 말이다. 가을은 익어 가고, 깊어 간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은 것처럼, 기온이 뚝뚝 떨어지면 가을은 점점 더 깊어 간다. 

  가을이 익고, 깊어 가는 것처럼 사랑도 깊어지려면 뜨겁게 달아올라야 한다.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여름이 지나야 가을에 열매를 맺는 이치와 같다. 남보다 훨씬 뜨거운 열기에 신음하고, 괴로워해야 한다. 뜨거움을 겪지 않은 설익은 사랑은 오래 갈 수 없다. 사랑도 열기에 제대로 익어야 오래 가고, 오래되어야 깊은 맛이 난다. 열기가 식었다고 해서 사랑이 식은 게 아니다. 비로소 사랑이 익어 간다는 의미이다. 불을 죽여 뜸을 들여야 밥맛이 제대로 나는 이치와 같다.

  어떤 작가는 ‘아픔 없이는 사랑일 수 없다.’라고 했다. 젊을 땐 그 말을 그리움 정도의 아픔이라고 이해했다. 그 아픔이 뜨거움에 데인 쓰라린 가슴의 상처란 것을 이제야 알았다. 데인 상처가 바로 깊은 사랑의 징표였다. 상처가 아물었다는 것은 그를 다시는 떠올리지 않고, 그의 존재가 내 마음에서 사라졌음이다. 세월이 약이란 말이 딱 맞는다. 

  가을이 깊어 가면 갈수록 난 가을을 탄다. 하고 많은 탈 것 중에 탈 것이 없어서 가을을 타냐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가을 탄다는 말 속에는 마음속에 숨겨 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바람이 담겨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바람이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맑은 샘물도 순수한 물이 아닌 것처럼 나 역시 순수하지 않았다. 겉과는 달리 속에는 엉큼한 욕망이 숨어 있었다. 이런 속내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다른 감정을 억지로 짜내 감추기 바빴다. 그럴 때면 소금 바람이 불어오는 허옇고, 목마른 염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순수하지 않더라도 사람 맛 나는 편한 사람을 원했다. 특히 기온이 뚝뚝 떨어지는 가을엔 더 간절했다. 날 감추거나 숨길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이면 그만이었다. 내가 세상을 삐딱하게 보고, 의심의 눈초리로 무엇이든 바라보는, 착한 사람보다는 못된 사람, 순종적이기보다 반항적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그런 사람이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물건을 어딘가에 처박아 놓고도 기억해 내지 못해 안달하는 것처럼 그런 사람을 기억해 내지 못하고, 기억해 내려 하지 않으면서 우울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태풍이 지난 자리에 가을이 익어 간다. 가을 타는 잿빛 남자가 아니라 불타는 가을빛 속에 묻힌 뜨거운 나를 상상한다.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 가는 것이라고 한 노랫말이 떠 오른다. 노랫말을 지은이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이제는 여유롭게 지내고 있을 것이다. 뜨거움을 경험했기 때문에 늙어가는 것을 익어 간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저 늙어가는 내가 아니라 익어 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얼마나 살겠다고 왜 그러고 다녀’라는 아내의 바가지에도 나를 더 뜨겁게 달궈 살련다. 가을이 익는다. 아니 깊어 간다. <수필문학.2020.10월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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