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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풍 박석준 Jul 24. 2020

지난 신문 한 장

   책장을 정리하다가 누렇게 바랜 신문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2006년 개띠 해를 맞아 개띠인 사람들의 신년 소감이 실린 특집호였다. 무엇이든 함부로 버리지 않고, 하다못해 연애편지 초고, 첫 직장에서 썼던 업무일지, 군대 시절 봉급봉투까지도 모아두는 내 습성 덕분에 예전 신문을 고스란히 다시 볼 수 있었다.

  신문에 실린 내가 쓴 소감을 읽으면서 책상머리에서 뭔가를 쓰고 싶어 안달하며 문학청년처럼 미친 듯이 써대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땐 두려움과 설렘이 샘처럼 솟아올랐었다. 요즈음 내 몸에선 바람 빠진 풍선처럼 그런 열정이 사라져 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때 마음 다짐을 잊은 탓일까, 아니면 잡다한 일과 생각에 매달리고 있기 때문일까.

  젊어지는 약이 있다면 사서 먹어서라도 도전적이고, 열정이 가득한 사람이 되고 싶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 처음처럼 한결같이 행동하고, 생기있게 살고 싶다. 언제부터인지 숨이 죽은 배추처럼 생활에서 생기가 사그라졌다. 글 쓰는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열정을 슬그머니 뱉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일을 처음 시작할 때 갖는 마음이 초심이다. 첫사랑의 두근거림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첫 직장에 출근할 때 온몸을 감쌌던 설렘과 두려움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초심을 잃지 않은 것이다. 

  생일에 축하 화분을 받았다. 꽃다발보다는 살아 있는 식물이 좋다고 한 내 말에 지인은 고심 끝에 고른 것이라고 했다. 장미를 심은 작은 비닐 화분 세 개가 하나의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앙증맞은 장미엔 노랗고, 빨간 봉오리가 맺혀 있었다. 해가 드는 이 층 창가에 두었다. 이틀이 지나자 꽃봉오리가 활짝 터지기 시작했다. 오월이 되어야 볼 수 있는 장미꽃을 삼월에 보면서 혼자 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망울이 터지는 장미 앞에서 아내를 불렀다. 

  “예쁜데, 누가 줬어?”

  숨이 막히도록 예쁜 모습에 놀란 표정을 지었으면 좋으련만, 예전엔 하지 않던 행동을 요즘 들어 많이 한다고 핀잔을 주던 아내다운 반응이었다. 

  열흘 정도가 지나자 꽃은 시들기 시작했다. 누렇게 변한 봉오리를 가위로 잘라내고, 옆 가지를 친 다음, 마당에 있는 화분에 옮겨 심었다. 다시 봉오리를 맺고 꽃이 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뿌리를 내려 살아남기만을 바랐다. 내년 봄이 되어야 꽃을 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울타리 옆 빨간 넝쿨 장미꽃도 떨어지고, 장맛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화분에 심은 그 장미 가지 끝에 노란빛이 보였다. 그동안 장미는 새로운 꽃망울을 터뜨릴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다. 장미꽃은 사라지지 않고, 가지 끝 꽃잎만 떨어드렸을 뿐, 아름다운 꽃을 피우려는 초심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신문원고를 쓸 때로 돌아가고 싶다. 되지도 않은 글이라도 부리나케 동창회 카페와 블로그에 올리려고 열심히 쓰던 열정이 지금까지 이어졌다면 좋았을 것이다. 초심이 변하지 않은 장미처럼 글 쓸 때만이라도 내 마음이 변하지 않고, 두려움과 설렘이 샘처럼 솟아오르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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