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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풍 박석준 Jul 23. 2020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이삿짐 중 문학이라고 쓴 책 상자에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가 눈에 띄었다. ‘웅진출, 92/10 4,500’이라고 표시된 스티커가 선명했다. 책 표지에 있는 테이프 자국만 없었다면 새 책이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이십여 년 만에 다시 집어 든 이 책은 광화문으로 근무지가 바뀌어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처음 만났다. 출간 소식을 알리는 신문에서 ‘싱아’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되살리고, 바쁜 일상에 지쳐 있던 나를 조금이나마 위로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몇 쪽을 읽어 내려가자 예전에 읽었던 엄마의 말뚝 1, 2와 배경, 시대, 내용이 비슷했다. 엄마의 말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해설서 같은 느낌이었다. 강렬함은 덜 했지만, 세밀한 묘사에서 작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 자화상 같은 소설이었다. 

  해방공간에서 벌어진 혼란과 6.25 전쟁, 피난살이 등 아버지, 어머니가 겪은 가슴이 아린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기 때문인지 그때는 내 가슴이 얼얼하지 않았다. 기대했던 내용과 다르다는 실망, 진저리나는 내용을 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읽은 이 책은 내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 같으면서도 내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첫 만남에서 느끼지 못했던 작가의 처절함이 가슴을 저리게 했다. ‘싱아’가 풍기는 아련함은 찾을 수 없고 삭막함만이 남아 있었다. 그 많던 싱아가 누군가 다 먹어버려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는 하늘이 노래질 때까지 헛구역질하느라 그곳과 우리 고향 뒷동산을 헷갈리고 있었다.’ 

  가족에게 덮친 수많은 ‘고약한 우연’들을 증언하는 것이 ‘고약한 우연’들에 대한 정당한 복수라고 한 작가는 이 책을 써 내려가면서 얼마나 많이 진저리쳤을까. 

  아버지, 오빠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남편, 외아들의 죽음까지 이어진 작가의 불행에 가슴이 아팠다. 신은 작가에게 탁월한 글솜씨를 준 대신 여자로서 가질 수 있는 가족의 행복을 빼앗아 간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아버지 죽음으로 나타난 자식에 대한 엄마의 집착을 보고 자란 작가는 딸의 팔자는 엄마는 닮는다는 속설처럼 엄마의 불행과 묘하게 닮았다. 작가와 엄마가 겪은 이러한 불행-고약한 우연-은 작가의 죽음으로 끝을 맺은 듯하다.

  작가는 출생에서 6.25 전쟁까지의 이야기를 썼다. 그의 생애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전쟁 이후에 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아들 죽음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을 시기에 이 책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용기이다. 아마도 작가는 엄마가 겪은 ‘고약한 우연’을 되새김으로써 자신의 ‘고약한 우연’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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