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담보다 실패담을 나누면서 우정이 돈독해진다
며칠 전 영국의 한 저널에서 OECD회원국 중에 한국의 우정결핍은 바닥이라는 보도를 냈다.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가장 큰 이유로 실패를 수용하지 않은 한국식 성공주의를 들었다. 그리고 한국은 최근에야 실패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했다.
우정과 실패를 수용하지 않는 성공주의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할지도 모른다. 분명히 상관관계가 있다. 우정은 오래 두고 사귀면서 자기의 속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가 되어야 생기는 것이지, 하루아침에 돈독해지는 것이 아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우리가 남이가”한다고 해서 우정이 생기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싸구려 우정은 까맣게 잊는다. 성공담은 겉 이야기라면, 실패담은 속 이야기이다. 친구가 나의 실패담을 인생실패로 간주하거나, 수용해주지 않는다면 그와는 겉도는 관계만 될 뿐 우정을 쌓아올릴 수 없다.
한국의 자살률은 영국의 5배에 달한다고 한다. 자살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그 중에 심리 정서적 원인이 된 자살은 안에 쌓아둔 부정적 감정이 많아, 극한 상황에서 그것들이 자신을 공격하는 무기로 돌변해 일어난다. 그것들은 미리 꺼내 놓으면 덜 고통스러운 것이 되고, 인간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는다. 도대체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영국은 인간의 무의식을 이해하는 데에 인간관계의 질을 중요하게 여기는 대상관계정신분석학이 발달한 나라이다. 우중충한 안개의 나라이다 보니 심리학자들이 마음의 깊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서 정신분석학이 발달했기도 했겠지만, 한편 한 개인의 내적 갈등은 의미 있는 인간관계를 통해서 치유될 수 있다는 신념도 있었을 거다.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 한 명이라도 있는 것이 그렇지 않은 친구 10명 있는 것보다 낫다. 온라인 친구 1.000명보다 오프라인 친구 1명이 더 소중하다. 관계는 환상이 아니라 실제이기 때문이다.
위 저널의 기사대로 한국이 드디어 실패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면, 덩달아 우정지수도 올라갈 것이다. 실패를 부끄러움이 아니라 다양한 인생경험중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보다 유의미한 인간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실패를 존재의 표현으로 본다면 인생관도 달라질 것이다. 치유가 되는 인간관계가 많아질 것이고, 한국은 더 이상 OECD회원국 중에 자살률이 상위에 랭크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퇴임을 앞두고 우울증이 와서 불면에 자살까지 생각해야하는 은행 고위 간부가 있었다. 밤낮 가리지 않으며 일했고, 실적을 위해서 자존심 따위는 일찌감치 버렸다. 어떤 때는 자신의 윤리적 수칙마저 무시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는데 벌써 물러난다고 생각하니, 더 승진해야 하는데 못하고 퇴출당하는 느낌이었다. 대처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내몰리는 느낌은 자살충동을 키웠다.
그 분이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조금 더 진급했어야 했으나 억울하게 못한 몇몇 퇴직 은행원들을 만나면서부터였다. 모임은 성공담과 실패담 모두가 인생의 소중한 경험임을 서로 인정했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음을 서로 격려했다. 그분의 말이다. “성공담보다는 실패담을 나누면서 우리는 친해졌고, 만난 지 얼마 안됐지만 벌서 우정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한 평생 살아온 은행원의 강박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