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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순례 Dec 19. 2019

영화 [벌새] 분석:남성원리의 철옹성은 높았으나...

서서히 그리고 침묵으로 드러나는 존재감

    

1. 독립영화에 대하여

  독립영화는 흥행이 목적이 아니고, 흥행이 목적이라도 상업영화처럼 대중의 기호를 맞추면 안 된다. 독립영화를 보려는 이유가 작품성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 기류를 잘 타면 흥행에 성공할 수도 있다. 지난 10월 8일까지 27번째 상을 받은 “벌새”가 여기에 속한다. 


  독립영화는 상업성으로 갈 것인가, 예술성으로 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지점에서 감독은 예술성을 먼저 택한다. 제작비가 적게 들어갔으니 본전에 대한 부담도 적다. 작품이 예술성으로 갈 때에 인간의 더 깊은 무의식의 차원이 투사된다. 독립영화는 볼거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볼거리가 없겠지만,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그 생각거리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의 내적 성장을 다루고 있다. 정신분석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내가 독립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2. 영화는 왜 침울했을까?

  관객은 시종 암울한 분위기에 젖어야 했다. 기분이 좋아지는 호르몬의 분비를 기대하지 마라. 왜 그랬을까? 시대적 분위기를 담고 있다. 영화는 1994년도를 배경으로 했는데, 그 때는 경제가 한창 일어나면서도 그 폐해가 수면에 올라오는 시기였다. 때를 같이하여 학교는 우열반 수업으로, 공부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을 일찍부터 구별했다. 가족은 어떤가? 부모는 공부 잘 하는 자녀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퍼주었고, 그렇지 못한 자녀에게는 무관심했다. 아이들의 인생목표는 명문 대학처럼 되어 버렸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사회는 남성원리에 의해 지배당했고, 여성원리는 억압되고 있었다. 전자는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의 구호를 외치며 앞으로 돌진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뒤쳐진 사람을 일으키며 “함께 가자 우리”를 구현하려는 사람들이다. 남성원리가 집단의식이 되어버리면 심지어 여성들도 여기에 따라야 한다. 

  영화는 중학교 2학년인 여주 은희가 엄마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엄마는 대답이 없다. 점점 더 큰 소리로 아파트 철문을 두들기며 엄마를 외치지만 남성원리에 동화되고 있는 엄마는 여성원리를 외쳐대는 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영화는 남성원리의 거대장벽 앞에 맞닥뜨려 서 있는 한 소녀의 성장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4살 소녀 앞에 버티고 있는 철옹성은 너무 높다. 그녀의 몸짓은 1초에 20번 이상이나 한다는 벌새의 작은 날개 짓에 불과하다. 그녀는 사회의 변두리를 서성거리는 이단자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존재를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영화에서 놓치면 안 되는 포인트이다.      



3. 콩가루 집안은 나쁜 건가?

  은희의 외삼촌이 자살을 했다. 아니,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남성원리가 뒤따라오지 못하는 그를 죽인 것이다. 자살은 없다. 무형의 범죄자라고해서 범죄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들은 법의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은 물론, 집단의식을 장악하고 있다.


  승용차를 타고 장례식장을 가는 은희의 가족은 모두 각각이다. 여성원리가 빠진 가족은 따뜻함을 잃어 목표만 있는 콩가루 집안이다. 부모는 더 많은 떡을 팔아야 하고, 공부 잘하는 오빠는 서울대를 가야하고, 여기에 반발하는 언니는 더 반발해야 한다. 여기에 대한 문제의식은 은희로부터 시작한다. 은희는 뿔뿔이 흩어지는 가족의 외로움을 직시한다. 외로움은 “우리 함께 가자”를 외쳐야 하나 용기가 없어 외치지 못하는 침묵의 소리이다.    

 

4. 하필이면 왜 떡 가게였을까?

  떡을 집에서 지어먹던 시기가 있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각 가정은 떡을 지을 일손이 없어졌다. 떡 가게가 여기저기 생기기 시작했고 장사도 잘 됐다. 떡 장수로 돈 번 사람은 꽤 많다. 하지만 영화 속의 떡은 이보다 더 깊은 함축적 의미를 가진다. 떡은 경제를 말한다. 예수님은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떡의 등장은 그만큼 경제가 우선이 되어버린 사회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떡은 남성원리이다.


  다른 한편, 떡은 여성원리를 의미한다. 여성원리의 가장 대표적인 특성은 “먹이는 것”이다. 80이 넘은 노모도 60이 넘은 아들에게 전화가 오면 제일 먼저 “밥은 먹었니?”라고 묻는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도 떡은 방앗간에서 빻아온 쌀가루로 집에서 엄마가 지어 주었다. 엄마가 곧 떡이다. 


  떡장수에게 떡은 모성의 기능을 상실한 돈일뿐이다. 떡집은 새벽에 문을 연다. 막 지어낸 떡을 내놔야 잘 팔린다. 온 가족이 새벽부터 떡에 달라붙어 떡을 팔았다. 방바닥에 수북이 쌓아올린 돈을 세는 모습의 상징성을 크다. 그들은 떡을 남들에게 팔기는 했지만, 그 떡으로 스스로의 허기진 배를 채우지는 못했다. 떡(남성원리)을 팔았지만 떡(모성원리)으로부터는 소외당하고 있었다. 


5. 희망은 가까운 곳에서 시작한다.

  은희와 남자친구 지완, 그들의 풋내 나는 사춘기 사랑이 그나마 따뜻하다. 혹자는 말한다. 전체적인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이 대목을 왜 삽입했을까? 그 때가 성에 대하여 본격적 관심을 가지는 시기이기는 하지만, 정신분석학적으로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성에 대한 관심은 그들의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상징적 행위이다. 

  남성에게는 여성의 원리가, 여성에게는 남성의 원리가 들어옴으로 진정한 자기가 된다. 이들의 자연스러우면서도 본능에 끌리는 신체적 접촉, 특히 첫 뽀뽀는 보다 궁극적인 실체에 닿으려는 무의식적 욕구이다. 자연의 생성원리이자 운영원리인 음과 양이 합쳐지는 욕망은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귀소본능이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은희가 떡집 딸이라 하여 의사 아들인 지완의 엄마로부터 거절당한다.      


6. 영혼의 벗은 필요할 때에 반드시 나타난다.

  은희가 한문 선생인 영지를 만난 것을 필연이다. 소울 메이트라고 할 수 있다. 파동이 같으면 반드시 서로 모인다. 간절히 원하면 원하는 것은 앞에 나타난다. 은희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앞에 나타났다. 그녀는 은희처럼 왼손잡이이다. 오른손은 의식과 남성원리라면, 왼손은 무의식과 여성원리를 말한다. 그것은 아직 의식화되지 않은, 의식화 하려는 여성원리를 말한다.    영지선생은 노동운동을 하다가 휴학한 상태이다. 노동운동 자체는 남성원리라고 할 수 있지만, 노동운동을 하게 하는 가치는 “우리 함께 잘 살자”는 여성원리이다. 시대의 거대한 담론에 매몰되어 그늘진 곳으로 밀려는 두 사람이 서로 만난 것이다. 이런 만남은 반드시 성장과 변화의 동력이 된다. 


  은희는 영지선생에게 떡을 선물하고 영지선생은 떡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맛있게 먹었다고 답례한다. 파는 떡이 아니라, 먹는 떡으로 대변되는 모성원형이 의식화되는 곳에는, 여성원형뿐만 아니라 성장과 변화를 위한 그 밖의 다른 원형도 의식화된다. 성장이 성장을 일으킨다.  자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성장이 일어난다는 거다. 다음은 영지선생이 은희에게 준 무형의 떡이다.  


  “자기를 좋아하게 되려면 시간이 필요해. 자기가 싫어지면 자기를 들여다 봐. 내가 이렇구나.”

  “맞지 마. 싸워” 

  모든 성장과 변화는 “자기애”로부터 시작한다. 여성의 당당한 자기애는 여성원리를 구현한다. 사회에 대한 반발이 동기가 된 은희의 가식적인 남성성에 매력을 느껴, 동성지향으로 은희에게 접근한 여후배가 은희를 떠난다. 당당한 여성으로 은희의 때가 왔음을 시사한다. 그것은 영지선생을 만나고부터이다.    

  

  7. 죽어야 산다.

  영지선생이 죽었다. 성수대교가 붕괴될 때에 죽었다. 개발의 상징인 한강다리가 무너진 것은 남성원리의 퇴각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한 여성(원리)의 희생이 있었다. 관객들의 마음을 아쉽게 하고 가슴을 울리게 하는 대목이다. “은희는 어떻게 하라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모든 죽음은 항상 이전 것의 종말이면서도 새로운 것의 시작이다. 


  은희가 영지에게 붙들려 있는 한, 은희는 없고 영지만 있게 된다. 영화는 물리적인 분리로 죽음을 선택했지만, 죽음은 항상 심리적 분리를 하여 새로운 자기로 출발하라고 하늘이 주신 선물이다. 떠나는 자나 남는 자나, 모두에게 죽음은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 인간은 자유를 선물로 얻는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일수록 새롭게 출발할 때가 왔음을 알리는 거다. 그것은 복음, 기쁜 소식이다. 은희의 때가 왔다.       


  7. 함께 그러나 홀로

  다시 학생들로 붐비는 운동장 한 복판에 깊은 생각에 빠진 은희가 등장한다. 다른 학생들은 서서히 회색으로 처리된다. 영화후기 나눔에 참석한 한 분은 이 대목을 이렇게 연상했다. “함께 있으면서도 함께 있지 못하는 소외된 은희, 저의 학창시절이 떠오릅니다.”


  그게 다는 아니다. 집단의식에 함께 있으나 “함께”에 동화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꽃을 피우려는 한 인간의 의연함을 보여준다. 이 때에 영지선생의 처음이면서 마지막 편지가 읽혀진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으면서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더라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뭔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이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학원을 그만둬서 미안하다. 방학이 끝나면 연락할게. 그 때 만나면 모두 다 이야기해 줄게.”


8. 함께 가자 우리

  영지선생은 떠났다. 이제 “모두 다”는 은희가 은희에게 말해줘야 한다. 분석심리학자 폰 프란츠는 그의 저서 “민담의 심리학적 해석”에서 한 인간의 성장은 홀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했다. 영화는 은희와 경계선에 있던 가족들이 서서히 그 경계선을 풀면서 은희에게 다가오는 구성을 하고 있다. 엄마는 떡이 아닌, 은희가 좋아하는 감자전을 은희에게 부쳐준다. 엄마에게는 모성원형이, 은희에게는 여성원형이 회복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삶이 힘든 것은 사람들 속에 있어야하기 때문이고, 또한 삶이 아름다운 것은 사람들 속에서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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