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조와 집착
“8년 전에 불과 사억에 분양받은 아파트가 십억이 됐다.” 이 말을 하는 분은 흥분했다. 그곳에 지하철역이 생길 줄은 몰랐단다. 2020년 상반기에 갑자기 부동산값 폭등을 맞을 줄도 몰랐단다. 지역 주민들은 십억짜리 로또가 당첨됐다고 모두 마음이 들떴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는 나는 꼭 만화를 보는 것 같았다. 얼굴이 상기돼 최근 일어난 부동산값 폭등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말하는 그분은 대박 터진 만화 속 주인공 같았다. 나도 만화 속 주인공이 되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그랬기에 만화와 나를 분리할 수는 있었다. 나는 삶을 한 발짝 뒤에서 관조하는 기회를 얻었다.
사는 것은 꼭 만화다. 어릴 적에는 만화를 즐겨봤다. 현실이 불만이어서 생긴 아동기 환상은 만화 속 주인공으로 대리 만족했다. 한 편의 만화를 다 보면 싫증 난다. 만화책을 덮으면 이야기는 끝난다. 아무리 재미있는 만화라도 두 번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화는 반납기간에 반납해야 연체료를 내지 않는다. 우리는 다시 동전 몇 닢을 챙겨 만화로 사방을 도배한 만화방 안에서 볼 만화책을 고른다. 그렇게 만화 이야기는 생성되고 소멸하기를 반복한다.
세상 이야기도 어릴 적에 본 만화처럼 일어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사 억이 십 억이 된 흥분은 곧 사라지고, 아파트도 사라지고, 만화 속 주인공도 사라진다. 인생의 만화는 다시 생성되고 소멸되기를 반복한다. 만화는 실화가 아니다. 보고 즐기면 된다. 만화 같은 것을 실화로 보는 것을 집착이라 하고, 실화 같은 것을 만화로 보는 것을 관조라고 한다. 장자의 호접몽은 실화같은 만화에 빠지지 말라는 교훈이다.
40대 중반의 남성이 10년 전에 끊은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소리 없이 침투해 확진자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을 우울증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침몰시키는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내가 달랠 수 없으니, 나라도 니코틴으로 나를 달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인생 만화는 힘들수록 실화처럼 느껴진다. 더군다나 집단이 함께 읽고 함께 슬퍼해야 할 만화라면, 그것의 강도는 더 크다. 이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혼자 잔잔히 있는 연습을 해야 한다. 무의식은 다음을 준비할 것이다.
소파에 몸을 묻고 몸과 마음에 긴장을 풀고 복식호흡을 길게 하라. 잔잔한 호수를 상상하라. 당신의 마음은 곧 잔잔해질 것이다. 그리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나서 지금 내 안에서 벌어지는 생각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라. 그리고 놓아 버려라. 그 어떤 사건도 잠시 왔다 사라지는 만화 속 이야기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인생 만화를 즐기려고 세상에 왔다. 만화를 실제처럼 아등바등하면서 살고나면 나중에 후회한다. 어린 시절에 만화책을 보던 행복을 기억하라. 그 기분으로 인생 만화를 즐기라. 누가 만화의 내용에 가타부타 하는가. 만화는 즐기면 된다.
인생 만화의 저자는 각자의 무의식이다. 인생 만화를 잘 읽어 내려가면 그 안에 내가 보인다. 다 내가 만든 것으로, 그곳에는 나의 흔적이 있다. 그 흔적들은 다 영혼의 성장소이다. 먼 훗날 우리의 후손들은 그 흔적에서 자신을 재발견하고, 자신의 만화를 창조적으로 만들어 갈 것이다. 욕망에 사로잡혀 인생 만화를 수집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만화가 당신을 수집해, 당신은 만화의 일부가 되고 만다.
공무원 생활을 한 20년 하다가 대학 전임교수가 된 분이 있다. 딱딱한 공무원 생활에서 자유롭게 학문을 할 수 있은 대학으로 전직은 그에게 큰 기쁨이었다. 그는 하늘이 준 복에 보답해야 한다며, 교수로서의 일을 너무 부담스럽게 느꼈다. 행복해야 할 인생 후반이 무거운 짐이 된 것이다. 열심히 하려는 의지가 무거운 짐이 됐다면, 만화가 당신을 수집한 것이다. 대학교수로서의 전직은 만화 이야기가 바뀐 것에 불과하다. 당신은 바뀐 이야기를 따라가 거기서 즐길 것을 즐기고 배울 것을 배우면 된다. 행복은 만화를 실화로 여기지 않고 만화로만 여기는 사람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