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것이 사는 거다
인류의 전쟁역사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먹는 것과의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조금이라도 더 잘 먹기 위하여 전쟁을 일으킨다. 잘 먹고 살면 잘 사는 것이고, 잘 먹지 못하면 못 사는 것이라는 통념은 지금도 통한다. 같은 브랜드 치킨이라도 잘 사는 동네에서 사 먹으면 더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더 많은 신경을 썼기에 맛있다고 한다. 믿고 싶지 않지만, 양쪽 동네를 살아 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고 몹시 씁쓸해 한 적이 있다.
먹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한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는지, 생일 때만큼은 최고가 되기 위하여 식탁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동서양의 전통이다. 가난하거나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도 그 날만큼은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것이다. 명절 때 맛난 음식을 많이 장만하는 전통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럼, 잘 먹기만 하면 정말 잘 사는 걸까?
페이스 북에 걸핏하면 맛난 음식을 올리는 페이스 북 친구를 보면 꼭 이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특별한 날 좋은 것 먹고 축하해 달라고 올려놓은 것이야 어쩌랴 마는, 식탁 사진을 단골로 올려놓는 분들은 꼭 그래야 하는 것 같다. 그의 타임라인에 들어가면 그가 요리사가 아닌 가 의심할 정도이다.
먹는 것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는 연령대를 보면 유년기, 그리고 일부 노년층이다. 유년기 때에야 어서 성장해야 하니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노년기에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다. 생애주기에 따른 정상적인 성장과정을 제대로 이수하지 못한 사람들이 나이 들면 먹는 것에 더 집착한다.
구강기 고착에 대하여
삶은 내적 세계에서 외적 세계로 지경을 넓혀 가다가 다시 본래 있었던 곳인 내적 세계로 진입하는 하나의 긴 과정이다. 한 삶에서 자신의 몫을 다해 내적 보화들을 깨내고 나서는 죽음을 통과하여 또 다른 삶으로 진입하는 거다. 노인은 생의 마지막 수레바퀴를 내적 세계로 돌려 거기서 퍼 올린 삶의 지혜를 외적 세계로 전해야 하는 소명이 있다. 그런데 여전히 소화기 계통의 저하로 잘 소화도 못 시키면서 음식에 집착하는 것은 그의 이전 삶이 어떠했냐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정신분석학에서는 구강기 고착이라고 한다. 유아는 엄마의 품에 안겨 엄마의 젖을 가장 편한 자세로 마음껏 빨아야 하는데, 환경결핍 등의 이유로 이를 충족시키지 못했다고 하자. 유아는 음식의 결핍과 정서적 결핍을 구분하지 못한다. 유아에게 음식의 결핍은 곧 음식을 주는 대상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정서적 결핍이 뒤따라온다. 그는 성장해서도 정서적 결핍을 음식으로 대체하려는 유혹을 받고 너무 쉽게 그렇게 함으로 음식을 탐하는 사람이 되거나 비만에 걸리기도 한다.
구강기 욕망에서 벗어나기
삶은 고단한 순간이 때를 맞춰 찾아오는 것이니 때로는 그런 퇴행을 통한 즐거움도 사람들에게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인격의 일부가 되었다면 큰일이다. 노후 준비를 충분히 해 둔 사람이 은퇴 후에 이제 내가 무슨 욕망이 더 있느냐며, 남은 생은 몸의 욕구를 돌본다며 맛난 음식이나 먹으면서 살기로 했다. 몸의 욕구를 채우는 일이 사람에게 얼마큼의 만족을 줄까? 그의 결심은 육 개월도 못 갔다. 그분은 짬짬이 동네 구립도서관을 드나드는 취미를 들였는데, 그러기를 한 육 개월 지나고 나서야 마음의 양식은 몸의 양식과는 차원이 달랐다는 고백을 했다.
어느 날 그는 구립도서관에 질서정연하게 진열된 책들을 보면서 이 책들이 다 본래는 나였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에 충만함을 느껴, 퇴직 우울감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허한 마음을 음식이 아닌 마음의 양식으로 채우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나를 만나는 용기는 나를 보는 용기
인간을 유물론적 존재로 본다면, 최대한 몸의 만족을 위해서 사는 일이야말로 최대의 행복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적으로 몸의 만족은 삶의 다양한 만족 중에 아주 작은 부분에 속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이는 인간은 죽음과 함께 몸도 정신도 다 사라진다는 유물론을 부정하는 증거이다.
구강기 욕망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거기서 세상살이에 대한 욕망이 생기고 그 욕망을 실현할 에너지도 생긴다. 거기서 사랑의 욕망도 나와 이성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도 한다.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를 사용하여 인간관계를 맺어가고 사회활동을 한다. 구강기 욕망을 억압만 한다면 삶의 의욕도 상실된다. 정년퇴직하여 의욕상실증에 걸리는 이유는 욕망은 아직 있는데, 발산될 외부대상이 없어서다. 욕망은 발산할 대상이 없으면, 또한 욕망 자체를 억압한다. 그것은 한 인간을 치명적 상태로 만들고 심인성 치매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 때는 대상을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욕망이 마음의 양식을 발굴하는 방법을 알아냈다면 마음의 여행지는 한 없이 깊고 넓다. 거기서 발굴할 보화는 무궁무진하다. 마음여행의 첫 행선지는 자신을 객관화시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거기에는 내가 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증오했던 것들이 무리를 지어 있다. 이것들은 나를 구성하는 것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나에게 기여하는 것들이다. 그런 나의 일부를 만날 용기가 없어 뒤로 돌아간 사람은 눈에 보이는 삶이 전부인 것처럼 거기에 집착하고, 그 상징으로 음식에 집착하는 버릇이 생긴다.
누구나 각자에게 필요한 보화를 얻는다
반드시 두려움을 통과해야 하는 이 여행을 피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각자에게 꼭 맞는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생의 후반기에 우울감이나 무력감을 달랜다며 걸핏하면 여행을 떠나는 분들이 있다. 그들이 “모든 여행은 곧 마음의 여행”이라는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면, 여행은 그들에게 눈요기나 일시적 위안거리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청년들을 여행시켜 견문을 넓히게 하라. 그런데 이 일도 자신의 구강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마음순례 박성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