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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순례 Nov 26. 2020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영화 《체리향기》후기

삶이 아름다우면 죽음도 아름답고, 죽음이 아름다우면 삶도 아름답다 

이란의 영화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체리향기》는 1997년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영화는 자살을 준비하는 중년 남성 바디가 한 노인과 만남으로 살 이유를 발견하는 내용이다. 


  영화의 서두는 “성령이 함께하시기를”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이어서 주인공 바디가 차창 밖을 두리번거리는 화면이 나온다. 그곳은 일용직 노동자들이 하루의 일감을 찾으러 나온 생생한 삶의 거리이다. 우리가 찾는 것과 찾아야 할 것을 매우 단순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를 넘은 성령이 함께하심으로 가능하다. 영화는 인간이 거룩한 영에 안내를 받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무표정하거나 헤어나올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바디의 표정은 관객의 주목을 받는다. 영화는 단 한 번 화면이동도 없이 바디의 표정으로 시작하여 바디의 표정으로 끝난다. 바디가 자동차로 오르는 둥근 모양의 산은 엄마의 젖가슴 혹은 에덴동산으로의 퇴행을 의미한다. 그곳은 안식은 있으나 자유는 없는 곳이다. 바디는 영원한 안식인 죽음을 선택하기로 했다. 

  죽음을 선택하기로 한 그에게 삶은 죽음의 부속물 같은 것으로 아름다울 것이 하나도 없는 낡아빠진 관념에 불과하다. 바디는 그의 낡아빠진 관념이기도 한 낡아빠진 고급자동차 레인지로버 안에 갇혀있다. 그의 그늘진 표정은 관념의 종착을 말해준다. 반면 성령은 생생한 삶에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면서 경험하는 것이다.


  왜 자살하려는지 바디는 말해주지 않는다. 아무리 이상화된 자살이라도 그것은 낡은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살의 중대한 이유가 있더라도, 그것 역시 끝까지 살아보지 못하고 이제는 살 수 없다는 하나의 관념을 실천으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물론 노인의 말처럼 어떤 때는 죽음이 해결책일 수도 있다. 삶과 죽음은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긴 과정이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와 함께 의지를 넘어 선물처럼 우리에게 주어진다. 인간의 조급증은 성령의 임재를 방해한다.     


  영화의 주요 배경인 흙먼지 날리는 공사장은 바람 또는 숨이라는 뜻을 가진 성령과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상호 보완적인 의미가 있다. 이슬람교도도 경전으로 받아들이는 구약성경의 창세기에 의하면, 사람은 흙에 하나님의 바람(숨, 성령)을 불어넣은 존재이다. 사람은 흙과 바람의 기묘한 혼합이다. 

  흙먼지는 혼합된 흙과 바람이 해체된 것이다. 흙과 바람으로 분리되어 허무에 빠진 존재가 다시 둘을 통합시켜 삶의 아름다움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영화는 눈여겨보게 한다. 그것은 체리향기 하나 때문에 자살을 포기한 노인처럼 매우 단순한 통찰이면 충분하다. 


  노인이 바디에게 지적한 말을 들어보자. “당신은 단 하나의 문제 때문에 자살을 하려는 거예요.” 바디는 오직 죽어야 한다는 일념, 그 하나에 집중하고 있다. 하나가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도 그곳에만 집중하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죽음에 일념 하면 삶이 안 보이고, 삶에 일념 하면 죽음이 안 보인다. 

  죽음에만 집중하면 삶을 소외시켜 죽고 싶고, 삶에만 집중하면 죽음을 소외시켜 삶이 얄팍해진다. 행복은 서로 다른 것들을 경험하면서 그 둘을 자신의 인격 안에 통합시키는 부단한 과정이다. 


  죽음에 집중하는 바디가 자기 죽음을 마무리할 사람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일용직 노동자, 사춘기 여드름을 아직 떼어내지 못한 가난한 군인, 흙먼지 날리는 곳에서 오믈렛을 요리하는 공사장 경비원, 학비를 벌려고 방학 중에도 일해야 하는 가난한 신학생이었다. 

  고단하지만 자기 삶을 성실히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적지 않은 돈을 제시하며 자신의 시체에 흙 스무 삽을 떠서 덮어 달라는 바디의 요청을 거절한다. 관념이 아닌 삶에 충실한 사람에게 돈은 중요하지 않다. 돈은 거대한 관념을 만든다. 

  좋은 집에 살면 행복할 것이다, 좋은 차를 타면 품위가 날 것이다, 명품을 걸치면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이것들은 그저 자아가 만들어낸 관념일 뿐이다.


  바디는 거리에서 만난 사람에게 당신이 이 일을 해서 얼마의 돈을 버냐고 빠짐없이 묻는다. 이것은 자기 일을 부탁하는 흥정이기도 하지만, 바디가 지금까지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낡은 고급자동차로 대변되는 자본주의의 관념에 빠진 소경이었다. 성령은 눈을 현실로 뜨게 한다. 


  신은 삶이며 죽음이다. 신은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하신다. 사람도 신의 마음이다. 신이 사람에게 죽고 싶은 마음도 주시고 살고 싶은 마음도 주시는 것은 당연하다. 신과 인간의 중재자인 성령은 바디에게 죽음 충동을 일으켰다. 신은 인간의 삶을 갱신시킬 중요한 시기에 죽음의 상징을 사용한다. 

  분석심리학에서 죽음을 변화와 성장의 상징으로 해석하는 것은 낯설지 않다. 성령은 변화와 성장의 지점에 서 있는 사람에게 그가 지금까지 경험하지 않은 것들을 경험하게 한다. 존재의 그릇은 그래서 넓어진다. 

  사람들이 안달하고 불평하는 것은 자기가 원하는 삶은 자기가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고집 때문이다. 우리가 즐길 아름다움을 바로 곁에 두고 어림도 없는 일을 고집하고 집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바디는 그를 가둬 자유를 빼앗은 낡은 고급자동차에서 내려야 한다. 차에서 내린 그는 공사장에서 날아오는 흙먼지에 덮였고, 흙먼지 냄새를 맡았다. 흙을 퍼 나르는 건설장비를 현장에서 봤고, 삽질하는 노동자도 봤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과 그곳의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 모든 것들은 차 안에서 망연자실 바라봤던 것들과는 다른 것들이다. 즉, 관념이 실재가 되는 곳에 그는 참여했다. 성령은 달리는 차 안에서의 관념, 그리고 차 밖에 존재하는 삶의 현장 사이에 존재한다. 


  휙 지나가면 겉을 보고 참여하면 속을 본다. 바디는 흙을 나르는 건설장비에서 쏟아지는 수십 톤의 흙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거기에 그의 그림자가 흙에 묻힌다. 그의 시체에 뿌려지기를 원했던 스무 삽의 흙과는 비교도 안 되는 양이다. 

  그러나 그림자는 묻히지 않는다. 가까이 들여다본 죽음의 실루엣은 그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사람은 죽지 않는다.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죽음에서 삶을 보여주고, 삶에서 죽음을 보여준다.


  살 준비를 마친 바디는 작은 돌 위에 걸터앉아 잠깐 잠이 든 사람처럼 됐다. 변화의 과도기에는 이런 몽환이 뒤따른다. 산기슭 공사장 인부가 그를 깨운다. “여기서 자면 어떻게요!” 지금은 잠에서 깨어날 때임을 알린다. “시멘트가 필요하시면 사무실에 가서 신청하세요.” 죽음의 관념에서 나와 너 자신의 삶을 건축하라는 거다. “어서 차를 치우세요.” 스스로 고급스럽게 됐으나 낡은 관념을 치우라는 거다. “따뜻한 차를 드릴까요?” 삶은 따뜻한 차 한 잔을 나누는 곳에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 세대가 흙을 얼마나 경시하는지 “흙역사와 흙수저”라는 말이 다 돌고 있다. 사람은 몸의 재료인 흙으로 내려와야 산다. 


  바디의 마음은 열렸다. 성령은 열린 마음을 파고든다. 바디의 차에는 언제 탔는지 모를 낯선 노인이 이미 앉아 있었다. 성령은 어느 날 갑자기 문득 내 옆으로 다가와 내게 필요한 말을 해주는 인격적 존재이다. 노인은 바디에게 인생 강연을 한다. 바디는 말하는 사람에서 듣는 사람이 됐다. 성령은 말하는 사람을 듣는 사람으로 바꾼다. 노인의 인생 강연은 특별할 것이 하나도 없다. 누구나 청소년 시절의 성장소설에서 읽었을 평범한 삶의 원리들이다. 


  “난 자살을 하려고 집을 나왔지만, 체리를 보고 마음이 바뀌었어요.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체리 한 개. 세상은 생각하고 아주 다르죠.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답니다. 낙관적으로 생각해요.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봐요.”


  성령은 이미 있던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보게 한다. 독일의 시인이며 극작가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인간은 아름다움을 통해 자유에 도달한다”고 했다. 자유는 관념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관념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사람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다. 이후 바디가 만난 자갈길, 나무, 길을 걷는 사람, 연인들, 아이들, 하늘, 구름, 태양, 달, 바람. 세상에 이것들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아름다움이 곧 성령이라 해야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 된다.


  바디는 자기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산 위로 올라간다. 죽으려고 파 놓은 구덩이에 들어가 정자세로 눕는다. 하늘에는 먹구름과 먹구름 사이를 이동하는 보름달이 보인다. 바디의 눈은 보름달을 응시한다. 어디선가 천둥소리와 비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낙엽이 바디의 얼굴에 사뿐히 내려와 앉는다. 바디의 무표정한 표정과 눈빛에 변화는 없지만, 처음과는 달리 무아경에 빠진듯하다. 


  그는 그가 누운 흙 웅덩이, 먹구름이 낀 하늘, 그 사이를 비집고 다니는 보름달, 천둥과 비 내리는 소리, 낙엽, 움직임도 소리도 없이 부는 바람, 낮에 본 것과는 다른 이 모든 것들과도 조용히 일체 되는 의례를 치르고 있다. 낮이 아름답다면 낮의 한 짝인 밤이 아름답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삶이 아름다우면 죽음도 아름답고, 죽음이 아름다우면 삶도 아름답다.     


가나심리치료연구소   박성만 

http://www.gana6.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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