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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순례 Dec 16. 2020

꼬부라진 지팡이 한 자루라면 우울증도 견딘다

 제 안의 슬픔을 모른 척하고 싶어 밝은 척도 한다


한때 잘 알고 지내던 분이 중증의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항우울제가 아니면 놔버렸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그분은 해 봐야 별 효과는 없다는 것을 가족의 권유로 이것저것 해보았다. 그러나 우울의 잿빛 하늘을 의지로 거둬내는 일이 절대 쉬운 일은 아니다.


감기 바이러스가 앓을 것 다 앓고 나서야 떠나는 것처럼 마음의 독감인 우울증도 그런 경우가 많다. 그 길고 어두운 터널을 보내는 데는 몸은 고사하고 손목이라도 의지할 꼬부라진 지팡이 하나는 꼭 있어야 견뎌낼 수 있다. 우울증 환자에게 이런 말이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성장의 변곡점마다 우울증은 항상 온다.


삶이 너무 길다. 통과할 의례가 너무 많다. 우울증이 오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더 낯설고 다양한 것들을 손님으로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사람이 밝아서 밝게 사는 것이 아니다. 제 안의 슬픔을 모른 척하고 싶어 밝은 척도 한다.


지난 10년 동안 심리서만 써왔던 내가 불현듯 소설을 쓰고 싶은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긴 서사가 있는 소설은 긴 인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 꼬부라진 지팡이 정도는 될 수 있을 것 같다. 밝은 척하려고 그동안 감춘 내 안의 밝지 않은 이야기를 소설 속 주인공 입으로 말하면 된다.


썼다 하면 베스트셀러가 되고 영화화하는 소설가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를 펼쳤다. 이 책은 글 쓰는 방법이 아닌 자세에 관한 책이다. 한 시간가량 읽고 나서 “솔직한 글쓰기”의 중요성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 이런 생각도 곁들었다. “사람들이 서로 조금만 더 솔직한 이야기를 나눈다면, 항우울 약물처방은 훨씬 줄어들 것이다.”


오래전 조울증에 걸린 내담자와 일 년 정도 상담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그분은 평소보다 더 우울한 표정으로 나를 찾았다. 잊고 지냈던 대학 동창들을 페이스북에서 하나둘 알게 돼 기뻤는데, 그들은 다 좋은 곳에서 좋은 음식 먹고 행복하게 잘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만 불행한 것 같아 더 우울해졌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했다고 했다.


그게 가능할까? 불행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인류의 몇 안 되는 행복의 화신으로 태어났거나 불행을 외면하고 행복의 환상 속에서나 사는 사람일 것이다.


사람이 솔직히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한 명만 있어도 우울증은 견딜 수 있다. 저자의 다음 글은 소설 쓰기의 매력과, 그 매력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날마다 또박또박 쓰지 않으면 마음속에서 등장인물들이 생기를 잃기 시작한다. 진짜 사람들이 아니라 등장인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인제 와서 긴 서사를 끌고 나가는 소설을 배우기는 너무 늦다. 심리 콩트라도 쓰고 싶다. 우울증 환자에게 지팡이 하나라도 마련해 주고 싶다고 시건방을 떠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선 나부터 그 지팡이를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가나심리치료연구소   박성만

http://www.gana6.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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