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심리학자 칼 융은 당시 서구 자본주의와 동구 공산주의의 극렬한 대립을 이런 방식으로 설명한 바 있다. 서구는 그들에게는 없고 동구에는 있는 “만인이 함께 잘사는 세상”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동구를 비난한다. 반면 동구는 그들에게는 없고 서구에는 있는 “특별히 부자로 살고 싶은 욕망”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서구를 비난한다. 즉 나에게는 없고 타인에게는 있는 것을 비난한다는 것이다. 이 사이를 수정자본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가 들어오면서 양자는 통합됐다. 오늘날 유럽 사회에는 극렬한 이념 대립이 없다.
작금 한국 사회의 진보와 보수의 극렬한 대립도 이와 같다. 진보는 그들에게는 없는 “상위 10 퍼센트 특권층의 혜택”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보수를 비난한다. 보수는 그들에게는 없는 “평등하게 잘 사는 세상”에 대한 위기의식과 콤플렉스 때문에 진보를 비난한다. 여기에 소위 “색깔론”이 개입되면 같은 집단 안에서 아군과 적군으로 분열된다. 그러나 북한의 약세로 “색깔론”은 힘을 잃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흐름은 무의식적인 것으로 칼로 두부를 자르는 나눔은 아니다. 선거를 앞두고 진보와 보수가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은 각 진영의 집단무의식이 작용해서 그렇다. 지금은 서로가 아군이고 적군이다. 그러니 그 경계선을 넘지 말라. 싸우랴! 폭력을 쓴다. 군인들이 개입하면 기관총을 쏜다.
선거가 끝나면 모든 기대와 좌절, 갈등과 희망은 무의식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유럽의 분열을 “수정자본주의와 민주적 사회주의”가 통합 시켰듯이 한국의 진보와 보수를 통합시킬 새로운 가치 체계가 필요하다. 그 체계는 무엇이어야 할까?
한편 대다수의 정치인은 진보와 보수의 극렬한 대립으로 “상위 10 퍼센트의 혜택”을 누리는 분들이다. 그들도 국민의 여망을 등질 수는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국민의 여론을 전달해야 세상이 조금씩이라도 진화한다. 광고비에 혈안이 돼 있는 언론은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누구나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양쪽 여론이 생생히 살아 숨을 쉬고 있는 SNS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