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이 종교인인 J는 ‘은밀하게 쌓아 올린 높은 기준’이 필요했다. 개인 분석에서, 그 기준이 한낱 관념인 것을 알자 J는 되도록 인간적이 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 높은 기준과 인격의 어두운 그림자의 갈등은 해결되지 않았다. 인격의 그림자는 없앤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높은 기준은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J는 이를 경험적으로 잘 알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내적 인격의 출현
그러는 중에 J는 자신 안에서 낯선 존재를 만났다. 이 존재는 자아와 소통이 가능하다는 면에서 인격적이다. 자아가 마음대로 불러낼 수 없다는 면에서 비인격적이다. 이 존재는 깊은 통찰 혹은 강한 정동(情動)으로 경험된다. 굳이 그 존재의 성별을 말하자면 남성인 J의 대극인 여성이다. 그녀는 친절하고, 따뜻하고, 관용적이고, 넉넉하고, 직관적이다. 의견이라기 보다는 기분이고, 행함이라기보다는 존재이다. 그녀는 출산 이전에 J를 품은 엄마의 자궁과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J는 그녀를 한 번씩 만날 때마다 깊은 물에서 생수를 길어 올려 마신 기분이다. 머리에 개념으로만 있던 신학적 지식이 가슴으로, 존재로 경험됐다. 그녀(자궁)는 서로 대극인 높은 기준과 그림자를 하나로 품었다. 둘의 갈등은 더 이상 갈등이 아니었다. 높은 산에 올라 산 아래를 내려다 보면 인간들의 아귀다툼이 다 이해되는 것처럼 말이다.
남자에게는 낯선 여성처럼, 여성에게는 낯선 남성처럼 경험되는 이 존재를 뭐라고 할까? 융은 내적 인격 또는 영혼의 안내자라고 했다. 그리스신화에서 따와 아니마와 아니무스라고도 했다. ‘아니마/아니무스’라는 용어는 내적 인격을 심리학화 하는 것 같아서, 나는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발견을 후학들에게 설명해야 하는 융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용어 선택이었을 것이다.
통합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사느냐, 죽느냐’로 고민했다. 햄릿에게 사는 것과 죽은 것은 서로 다른 것이다. 내적 인격을 만난 사람은 자신 안에 삶과 죽음이 동시에 있는 것을 알기에, 사는 것과 죽는 것은 별개가 아님을 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은 언어의 유희가 아니다. 내적 인격과 소통한 사람은 서로 다른 두 개의 대극은 하나의 점에서 만나는 것임을 잘 안다.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지 않는다.
J는 이러한 마음의 깊이에 도달하자, 꿈속에 미지의 여성이 종종 등장했다. 비록 꿈이지만, 도덕적인 이유로 J는 그녀를 경계했다. 그러다 점점 그녀와 친해졌고, 자유로운 교제를 즐겼고, 스킨십과 성교도 일어났다. 프로이트는 이 꿈을 억압된 성욕의 발산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융은 자아가 심혼인 내적 인격을 만나는 꿈으로 해석했다. 나의 분석 경험에 의하면, 성장하는 중년의 꿈에는 꼭 낯선 이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성적이지만, 성적 그 이상의 존재로 경험된다.
신비주의에서 인간이 신과 만나는 절정을 성적 상징으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이해한다면, 내적 인격이 꿈속에서 이성으로 등장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