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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순례 Apr 19. 2023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죽음의 마지막 단계는 평화롭다


유물론자일수록, 그리고 종교인이라도 그 종교의 가치를 내면화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죽음을 두려워한다. 나는 임종 환자를 영적으로 돌볼 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종교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거의 죽음을 거부하고 두려워했다. 독실한 종교인이라도, 가족들 앞에서 편하게 자신이 떠나는 것을 인정하고 귀감이 되는 유언을 하는 분들은 매우 드물다. 


그러다 의식이 더는 기능하기 힘든 반 무의식 상태에서 죽음을 수용하는 것을 나는 봤다. 이 분야 연구의 대가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 Ross도 대부분 사람이 죽음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는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한다고 했다. 


이때 가족은 편안히 보내드려야지 슬피 우는 것은 죽어가는 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떠나는 길을 불안하게 한다. 만일 죽음 준비가 충분히 됐다면, 그는 의식적 수준에서 자아의 기능이 작동할 때 죽음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은 두렵고 불안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룩한 의례가 될 것이다. 전생애 의료비의 70~80%를 쓴다는 불필요한 연명 치료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전진을 최우선 과제로 여기는 시대의 자화상은 죽음 교육을 피한다. 종교에서도 축복을 선포하느라, 죽음 교육을 피한다. 상담 대학원에서도 사별과 애도를 따로 떼어 한 학기 다루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분야 명저가 번역돼도 관심을 끌지 못한다. 


필자가 담당 교수로 있던 상담대학원에서 사별 애도를 한 학기 다룬 적이 있었는데, 관심도가 매우 높았다. 마치 인생론을 공부하는 것 같았다. “죽음을 알면 삶도 안다.” 죽음을 회피하는 것은 삶도 회피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최근에는 여러 군소 단체에서 죽음 교육이 행해지고 있다.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어제 지인의 전화를 받았다. 80이 넘으신 어머니가 백혈병에 여러 합병증으로 요양 병원에 가셔야 한다는 것이다. 마땅한 요양 병원을 방문해 보니 철장 같고, 어머니는 그곳으로 가시기를 두려워하신다. 자식으로서 어머니가 그렇게 생을 마감하는 것에 가슴 아프다는 것이다. 그 감정은 이해한다. 옛날 같았으면 집에서 가족의 병간호를 받고, 곡기를 끊고 생을 마감할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이 치매 아니면, 가족이 병간호를 감당할 수 없는 지병으로 요양 병원에 계시다 생을 마감한다. 현대판 생로병사의 과정이다. 


나는 그분에게 당신도 그 길을 갈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사람이 가는 그 길을 너무 감정적으로 다루지 말라고 했다. 요양 병원에서 어머니가 어떨지는 당신이 아닌 어머니의 몫이라고 했다. 죽어가는 자의 죽음 준비는 죽어가는 본인이 가장 잘한다. 살아있는 자는 옆에서 함께 할 뿐이다. 나는 그분과 “고령화 시대에 장수는 복인가”에 대한 긴 대화를 나누었다. “생명의 연수는 복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나 자기 몫의 세월을 살다 간다.”



가나심리치료연구소  박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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