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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순례 Apr 29. 2023

임종 환자의 환시는 무엇이고, 왜 일어날까?

죽음 심리학

임종의 시간을 알리는 사인 중에 예외 없이 일어나는 것 하나, 돌아가신 그의 부모님이나 가까운 사람이 나타나는 것이다. 또는 그의 생애에 의미 있던 장소가 보이고 에피소드가 재현되기도 한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것은 환시가 아니라 실제이지만, 가족이나 의료인은 “섬망”이라 한다. 섬망은 뇌의 기능장애로 발생하는 이상 심리를 말한다. 선친께서도 숨을 거두시기 2~3주 전부터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저 문 앞에 와 계신다며, 링거를 다 뽑으시고 아버지를 마중 나가려 했었다. 그때는 그것의 의미를 몰랐다.     


최근 세상을 떠난 나의 지인은 그의 생에 가장 즐거웠던 옛집에서 그때 함께 한 사람을 만나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남자의 경우에는 군대 생활로 돌아가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이것은 군대 생활이 즐거워서가 아니라 그만큼 힘든 일로 무의식에 각인 됐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섬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그의 부모나 그의 생에 의미 있었던 사람, 또는 기독교인에게 천사 불교도에게 보살이 나타난 것은 예외 없는 통과의례이다. 필자의 임종 환자 돌봄 경험에 의해서, 병원에서 원목을 하던 분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그렇다. 그것도 섬망일까?    

  

사람이 죽음으로 임박하면 급 무의식 상태로 진입한다. 무의식 상태에서 자아는 현실 감각이 거의 없어지고, 무의식과 대화를 한다. 깊은 무의식 상태에서는 신체적 고통도 잘 모른다. 그래서 치매 환자는 다른 질병에 걸려도 통증을 잘 모른다. 수면 내시경에서 주사하는 프로포폴은 몸에 화학적 작용을 일으켜 환자를 깊은 잠이 들게 한다. 즉 깊은 무의식에 들게 하는 것이다. 이 부분은 의학적 견해에 따라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사람은 깊은 무의식 상태로 들어가면 현실 의식은 상대적으로 축소된다. 반면, 삶과 죽음의 원형 보관소인 무의식과는 가장 깊은 교제에 들어간다. 여기에서 최면술사가 행하는 소위 “전생 퇴행 최면”도 가능해진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도 깊은 무의식 상태에 있는 정신병자의 말을 잘 분석하면, 인류가 공유하는 원형적 요소가 있다고 했다.  

   

따라서 아직 살아있는 사람은 그의 깊은 무의식과 대면하고 있는, 죽어가는 사람의 심리를 과학적 심리학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죽어가는 사람은 진실을 말해도, 그 말을 듣는 살아있는 사람은 그 말을 “헛소리”로 듣는다. 살아있는 사람은 의식적 세계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이상심리는 그 시대에 통용되는 보편적 심리를 넘어선 것을 말한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천재는, 특히 천재 예술가는 거의 이상 심리에 속한다. 만일 당신이 인간보다 비교할 수 없이 문명이 앞선 외계인과 대화를 나눈다면, 당신은 그를 이상 심리로 규정할 것이다.    

 

필자가 이런 논리를 펼치는 것은 죽어가는 자의 언어는 죽어가는 자의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럼, 아직 죽어가지 않는 자가 어떻게 죽어가는 자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누구든 관심을 가진다면, 이 분야에 연구와 임상들은 제법 쌓여있다. 필자는 분석심리학 관점에서 “죽어가는 사람의 무의식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라는 주제로 여러 번 세미나를 열었다. 임종의 막바지에 달하면 환자들은 다가오는 죽음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미지의 죽음은 두렵고 불안하다.  

    

이들에게 삶과 죽음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것임을 알려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먼저 죽은 그들의 부모, 또는 그의 생에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죽은 사람, 종교인에게는 종교적 대상을 보내주는 것이다. 내가 사랑했고 존경했고 그리워했던 대상이 거기에 있다니! 죽어가는 사람은 이들을 보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앤다. 이들을 죽음 초입에서 만나는 인도령이라 한다. 신은 자상하고 친절하다. 그의 피조물이 두려워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것을 가장 인간적인 방법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누구든 죽음과 더 가까워질수록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족은 더 두려워하지만. 끝까지 삶에 집착하는 사람은 이러한 순환에 자신을 맡기지 못해 두려움을 가지고 그곳으로 간다. 그는 죽었으나 거기서도 죽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섬망이라고? 3차원의 세계관에서는 그렇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3차원의 세계를 넘어가고 있는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그들의 두려움을 달래는 신의 위대한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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