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상담심리학 수업에 여러 번 참석한 중년 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가끔 허리가 아프다며 일어서서 수업받겠다고 했다. 병원에는 가 봤느냐고 물었더니, 정형외과에서 허리 디스크를 진단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이런저런 민간요법을 썼으나, 잠깐 좋아지다가 점점 더 나빠졌다.
반년이 지났을까?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교수님, 저 췌장암 말기입니다. 암세포가 다른 곳으로 전이되었다고 합니다. 6개월 선고받았어요.” 나는 깜짝 놀랐다. 췌장암을 허리 디스크로 잘못 알고 있었다니. “신유치유와 식이요법을 겸하는 기도원이 있어요. 거기 들어가기로 했어요.”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그녀의 심정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치료 잘 받으라는 인사말을 전했으나 가슴이 시렸다.
전화를 끊고 나자 식이요법은 좋지만, 신유치유라는 말이 자꾸 걸렸다. 기적에 대한 희망 때문에 죽음 준비를 제대로 못 하고 갑자기 임종을 맞는 분들을 나는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6개월쯤 지나서다. 그녀는 기도원에 와서 많이 좋아졌고, 많은 것을 배웠다며 밝은 목소리로 전화했다. 그녀는 신적 권능으로 완치에 대해 기대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나는 암 환자가 병세가 악화하기 직전에 잠깐 좋아지는 것을 자주 봤다. 내 마음은 무거웠다. 그녀는 곧 닥칠 죽음 준비보다는 살 준비를 하는 것으로 보였다. 죽음은 그녀에게 더 두려운 것이 될 것이다. 이후 그녀와의 연락이 끊겼다.
그리고 4개월쯤 지났을까. 그녀와 함께 있는 네이버 밴드에 그녀의 아들이 글을 올렸다. “어머님 장례식을 잘 치렀었습니다. 어머니가 함께한 밴드이기에 소식을 알립니다.” 그녀는 6개월 선고받고 10개월 정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강의실 뒤에서 허리를 움켜쥐고 서성이며 수업받던 그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수업 중에 그녀는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럴 때마다 얼굴에 잿빛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그림자는 그녀도 모르게 그녀를 노크한 죽음의 사인이었을 것이다.
어느 수업 시간이었다. 그녀의 얼굴에 잠깐씩 스치는 그림자가 평소와 달랐다. 그림자는 애잔하면서도 강한 그리움을 담고 있었다. 먼 희망을 담고 있는 그림자라고 할까. 그것은 곧 현세를 떠나서 맞이하게 될 영원에 대한 그리움이었으리라. 그리고 완치에 대한 그녀의 기대는 암의 완전한 치료가 아니라, 영원한 세계에 대한 무의식적 기대였을 것이다. 그녀의 무의식은 이미 곧 다가올 죽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의식의 수준에서는 자신이 떠날 때를 모르거나 거부해도, 무의식 깊은 곳에서는 죽음의 때를 이미 알고 있다. 무의식은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의식에 죽음의 사인을 보낸다. 본인이 알아차리지 못하면 주변 사람에게라도 알린다. 현자(賢者)는 이 사인을 잘 포착해서 죽음을 환영했다. 그들이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죽음의 때를 안 것은 아니다. 보통 사람과는 달리 죽음 사인을 거부하지 않은 것뿐이다. 죽음의 사인을 거부하면 죽음은 더 두려운 것이 되어 죽어가는 자를 덮친다. 만일 그가 죽음의 사인을 환영한다면, 환영받은 죽음의 사인은 그를 편안하게 할 것이다.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그림자 같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밝은 목소리는 삶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죽음 이후 완전한 치유에 대한 기대였을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진 죽음의 두려움으로 그녀를 봤기 때문에 그녀가 삶에 집착한다고 걱정했을 것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었다. “평소에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받아들여라. 그런 사람들에게는 죽음의 사인도 그중 일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