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로 위암 말기에 걸려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가시는 몇 개월만이라도 맨정신으로 지난 삶을 되돌아보시라고, 아버지의 술 요구를 거절했다. 그것이 아버지를 위한 최선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가끔 아버지 방에 들어가 아버지의 술로 가족을 포함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받았는지 아시냐며, 그런 일들을 다 되돌아보고 영혼을 정화하셔야 좋은 곳에 가실 수 있다고 했다. 그게 아버지에 대한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아무 말씀 없이 듣고 만 계시다고 가끔 화를 내시며 말씀하셨다. “인제 와서 다 어떻게 하라고!”
어느 날, 큰딸이 아버지를 방문했다. 딸은 아버지가 주무시다가도 일어나게 할 소주를 손에 쥐고 있었다. 딸은 아버지가 사시면 얼마나 사신다고 그렇게 좋아하시는 술을 드시게 해드리고 싶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육십 평생을 처음으로 한 달간 알코올 기운 없이 사셨는데, 알코올을 다시 몸에 넣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분으로서 옳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잠시 생각에 잠긴 뒤에 누님의 말에 동의했고, 아버지에게 술상을 차려 드렸다.
아버지는 안면 가득 웃음을 지으시면서 술을 한잔 얼른 들이켜셨다. 그리고 이내 토하셨다. “이제 내가 술을 다 못 먹는구나.” 한 잔 따르고 남은 술은 병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아버지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다. 아버지의 얼굴은 담담하셨다. 아들은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소화력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술을 사다 드릴걸!”
죽어 가는 사람은 산자의 위대한 심리치료사
그 후,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술 드시고 싶단 말씀을 한 번도 않으셨다. 모든 사람의 무의식은 죽음의 때를 알고 스스로 준비한다. 아버지는 술이 위장에서 받지 않자 죽음의 때를 아셨고 준비하셨다.
산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최선은 산자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다. 죽어가는 자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돕는 일이다. 죽음을 앞에 둔 몇 개월은 변화와 성장이 아닌 그가 살아온 삶을 스스로 정리하는 기간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두 마디의 말씀이 떠올랐다. “인제 와서 어쩌라고!” “이제 내가 술을 다 못 먹는구나!” 전자는 너의 삶을 과거에 묶어 두지 말라는 유언이었고, 후자는 모든 것은 다 때가 있으니 순리에 따르라는 유언이었다. 죽어가는 사람은 간혹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의미심장한 언어로 표현한다. 아들은 깨달았다. “아버지의 두 마디는 아버지 스스로 죽음을 정리하신 유언이었다.” 죽어가는 사람은 어떤 산 자보다도 죽음의 세계에 가까이 있다. “누가 더 죽음 준비를 잘하겠는가?” 죽어 가는 사람은 산자의 위대한 심리치료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