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난생처음으로 산부인과라는 곳을 방문했다. 전국이 출산율 때문에 비상인데 그곳만 봐서는 우리나라의 미래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저렇게 임신부들이 많은데 왜 우리에게는 작은 별이 찾아오지 않은 걸까.
우리는 과잉진료하지 않고, 다정하지는 않더라도 할 말을 딱 끊어서 하는 의사를 미리 물색해뒀다. 우리 둘의 몸에 이상이 있다면 그 내용을 직설적으로 알기 원했고, 약물치료든 난임시술이든 다음 단계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이 좋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아내 나이가 만35세가 넘어 ‘노산’으로 분류되니 제왕절개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우리 지역 내에서 그 의사의 찢고 꿰메는(?)하는 기술이 제일 섬세하다고 입소문이 나있기도 했다.
산부인과 전문의도 성향과 전문분야가 다르기에 미리 잘 알아보고 병원을 방문하는 것이 좋다. 어떤 의사는 자상하지만 상대를 지나치게 배려해 말을 빙빙 둘러 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의사는 불필요할 정도로 직설적이어서 임산부의 맘을 울리기도 한다. 병원을 가기 전 본인 취향에 맞는 의사를 알아두는 것이 좋다. 맘카페와 지역카페, 혹은 젊은 엄마들 커뮤니티 등에서 귓동냥을 할 수 있다.
원무과에 접수하니 상담실장이 부른다. 의사를 만나기 전 가벼운 설문조사를 하고 질의응답을 통해 병원을 찾은 목적과 현 상황에 관해 대화를 나누게 된다. 이 상담자료를 바탕으로 전문의가 진료 방향을 설정하는 듯했다. 상대하는 환자가 많아 짜증 날 법도 한데 절박한 사정을 헤아려준 것인지 편안한 분위기에서 아주 상냥하게 상담을 진행해주었다.
의사는 일단 부부의 생활패턴이나 평소 건강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으니 바로 몸 상태를 검사해보자고 했다. 여기서 몸은 ‘아기를 가질 준비가 된 몸’을 뜻한다. 아내(여자)의 경우 채혈을 통해 난소 나이를 측정하고, 나팔관과 자궁 안쪽에 정자의 통행과 착상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한다. 나(남자)의 경우는 정자의 질과 활동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정액 채취를 한다.
간호사가 부부를 각각 다른 곳으로 안내한다. 내가 인도받은 곳은 간이침대가 놓인 작은 방이었다. 인터넷으로 미리 알아보고 갔지만 생각보다 더 민망했다. 벽걸이 TV가 있었고, 리모콘 사용설명서가 테이블에 붙어 있었다. 후처리를 위한 물티슈와 휴지통도 함께. 약 50ml의 작은 플라스틱 통을 간호사가 주고 가는데, 이 공간에서 뭘해서 어떻게 조치하라는 안내는 없었다. 뭐, 이미 다 알고 왔을 테니까. 그런데 왜 하필 내부 조명은 꺼지다만, 어두운 분홍빛인지….
어찌 되었건 일을 치르고 정액을 채취해야하니 TV를 켜 영상을 틀었는데, 아뿔싸.. 거의 30년은 묵은 듯한 영상이 나온다. 영상 속 누님은 아마도 지금쯤 할머니가 되어 계실 것이다. 블로거가 왜 휴대폰에 취향껏(?) 최신본을 구비해가라고 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명심하라. 원활한 과업 수행(?)을 꾀한다면 친구들에게 미리 발품을 팔아 괜찮은 영상을 구해두도록 하자.
어찌저찌 주어진 과업을 해내고 플라스틱 통을 간호실에 전달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원무과 앞 의자에 대기하던 임신부들이 힐끗 쳐다보는 것 같다. 얼굴이 새빨개진다.
아내는 난소 나이를 측정하기 위한 채혈을 마치고 나팔관, 자궁 내벽 검사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어땠어? 좋았냐? 풉...”
“아놔, 그렇게 놀리기 있나? 근데, 내 스타일이 아니었어. 다음엔 내가 글래머 누님들로 영상 준비해야겠...”
아내가 성급히 입을 틀어막는다.
“용썼으니 나중에 밥은 오빠가 좋아하는 걸로 해줄게. 에구 내식히. 킄크...”
아내의 나팔관, 자궁 검사 시간이 되었다. 차가운 쇠붙이가 몸속으로 들어오는 생애 첫 경험에 약간의 긴장과 함께 아내가 시술대에 오른다. 난 의사 진료실에서 대기했다.
“꺄아악~~~ 꺅, 꺄악”
일순 아내의 단말마가 병원 온 복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나팔관에 조영물질을 강제적으로 투입하는 이 시술은 사실은 엄청나게 큰 고통을 수반한다. 생살을 찢고 물질을 투입하기 때문이다. 이 통증을 입소문으로 들은 여성들이 시술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고. 의사는 ‘약간 아플 수는 있어요.’라는 말로 최소한의 알릴 의무를 수행하긴 했다.
절둑이며 시술대를 내려온 아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선생님, 약간 아픈 정도가 아니잖아요..ㅠㅠ”
산책가자고 꼬셔놓고 동물병원에 끌려가 예방접종을 당한 반려동물의 심정이 이러할까. 주인에 대한 무한한 배신감과 낯선 알력에 아무 항거도 해보지 못한 무력감. 아내의 표정은 단순한 분노 이상이었다. 인류애에 대한 무한한 배신감과 미처 폭발시키지 못한 채 임계지점을 맴도는 거룩한 火.
“두 분 다 너무 건강하신데 어떻게 5년 동안이나 임신이 안 될 수 있죠? 이 상태에서 임신이 안 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둘이 합방을 안 한 거 아닙니까?”
우리도 나름 타이밍러시(?)도 하고 노력했다고요!
냉정하게 할 말만 한다는 의사라 해서 찾아갔는데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어쨌든 직설적으로 둘의 몸에 이상이 없다는 건 확인했다. 나팔관 조영술을 받는 과정에서 정자의 통행로가 넓어졌고, 향후 6개월간은 임신할 확률이 조금 더 높아졌으니 그동안 배란을 촉진하는 약을 먹으며 한번 임신을 노려보자고 덧붙였다.
“아내 분 몸 상태가 워낙 건강하니 배란 주사까지는 필요 없어 보여요. 난임전문병원을 굳이 찾아가지는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일단 배란을 촉진하는 약을 처방해드릴 테니 잘 챙겨 드시고, XX일 XX시 꼭 합방해보도록 하세요. 잘 될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우리의 몸이 건강하다는 안도감과 그런데 왜 5년 동안 기별이 없었을까 하는 의아함, 그리고 많이 배운 의사라 하여 그렇게 도덕성이 뛰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임상 결과를 얻은 채 병원문을 나섰다.
어디선가 스산하게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이 텅 빈 거리를 할퀴고 지나간다. 아직 공기가 매서운지 드문드문 보이는 행인들은 옷깃을 단단히 여민 상태로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봄햇살이 아직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