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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국 마늘 Mar 26. 2023

영국인 매너 따라잡기


약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처음 영국에 왔을 때다. 남편과 시댁 식구들이 소개해 주는 영국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상할 정도로 자꾸 괜찮냐(Are you alright?)고 묻는 게 아닌가. '아니, 처음 보는데 왜 자꾸 괜찮냐고 묻지?'




그동안 배워 온 미국 영어에서는 늘 "Hi, how are you?"로 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면 나는 "I'm fine, thank you"로 답한다. 그게 정답이니까. 그런데 영국 사람들이 "Are you alright?"이라고 하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헷갈렸다. 정답을 알지 못하는 나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I'm good, thank you!




우스갯소리로 외국에서 어학연수하던 한국인이 사고가 나서 피를 흘리는 상황에서도 "I'm fine, thank you"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같은 한국인임을 입증하듯 나의 대답도 한결같았다.




교회 목사님도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Are you alright?"이란다. 아니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면 좀 생략해 주면 안 될까? 나 같은 외국인은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어버리기도 하니까.






Azad에게 영어 수업을 받을 때다. 내가 10대, 20대 아이들과 함께 알바를 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나는 아이들을 보자마자 인사처럼 "어? 너 피곤해 보이는데?'라고 얘기하곤 했다. 얘기를 들어 보면 놀기도 바쁜데 알바까지 하려니 피곤할만 했다. 그런데 이 얘기에 Azad가 깜짝 놀란다.




Azad : 영국에서는 그렇게 얘기하면 안 돼. 무례한 행동으로 여기거든.

나 : 왜?????

Azad : 그 사람이 피곤해 보인다는 걸 네가 꼬집어 주는 거잖아.

나 : .....

Azad : 보자마자 그런 부정적인 말로 대화를 시작하는 건 실례야.

나 : .........




상대방을 걱정하며 건넸던 말이 설마 실례가 될 줄이야. 생각도 못 했던 일이었다. 물론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는 바로 할 수 있는 말이란다. 하지만 직장(심지어 알바라 할지라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그렇게 대화를 시작하면 안 된다는 게 Azad의 설명이었다. 하.. 어렵네.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있으면 늘 종업원이 조심스레 다가 와 묻는다.


"음식은 어때요? 혹시 입에 안 맞거나 불편한 점은 없으세요?"


그러면 나는 아직 부지런히 씹고 있던 음식을 급히 입안 양쪽 구석으로 밀어 넣으며 답한다.


"정말 맛있어요, 고마워요"


속으론 '그렇게 꼬박꼬박 안 물어봐도 괜찮으니 편하게 밥 먹게 내버려 두지' 하면서 말이다.  






얼마 전, 남편 출장을 따라 글래스고에 갔을 때다. 아침을 먹은 뒤, 남편은 일하러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글래스고에서 먹은 아침 식사


"준비 다 했어? 배웅해 줄게"

"그래? 어디까지??"


아니, 어디까지는 어디까지인가. 숙소 문 앞이지. 그런데 남편은 숙소 문을 열고는 그대로 붙잡고 있었다. '아차' 싶었지만 곧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떠랴' 싶었다. 




엘레베이터 앞까지만 가야지 했다가 결국 숙소 건물과 별도로 떨어져 있는 주차장까지 따라갔다 왔다. 그렇게 배웅 받고 싶어 하는 남편도 남편이지만 얼떨결에 주차장까지 따라갔다 온 나도 나다. 우유부단의 대명사. 으이구.




그런 생각을 하며 호텔 방으로 돌아가려던 때다. 나보다 앞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두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한 명은 40대 초반 정도로 언뜻 봐도 출장맨. 편한 차림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말쑥한 느낌이었고 혼자였다. 또 다른 한 명은 불룩 나온 배에 풍채가 있는 할아버지셨다. 더욱이 해리포터의 해그리드마냥 수염까지 길게 길러 눈에 띄었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서로 먼저 타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나는 그 뒤를 따라 쪼르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출장맨이 할아버지에게 몇 층에 가시냐고 묻는다. 버튼을 보니 이미 내가 가려는 3층은 눌려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뭐라고 대꾸를 한 뒤 조용해졌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3층 가는 게 한 30층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3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동방 예의지국에서 온 나는 먼저 내리라는 뜻을 비추기 위해 두 사람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출장맨은 할아버지에게 내릴 건지 물어본다. 할아버지가 안 내린다고 하자 출장맨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아무 말 없이 내린다.


'아니, 이럴 땐 보통 다시 나에게 먼저 내리라고 제스처라도 한 번 취하던가, 아니면 'thank you'라고 인사하고 내리는데. 매너가 없구만!'




기분이 상했다.  





영국에 온 지, 거의 만 5년. 이제는 안다, "Are you alright?"이 아주 기본적인 영국인의 매너라는 것을. 단순히 'Hi'로 끝나지 않고 상대방이 괜찮은지 물어봐 주는 것. 이것이 그들의 인사이며 그들에게는 기본이다.




요새 난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웃으며 인사한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음식이 내 입에 맞는지 누군가 물어보러 오지 않으면 서운하다. 마치 받아 마땅한 대접을 못 받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내가 뒷사람을 배려해 문을 붙잡아 줬는데 뒷사람이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 않는다. 그러면 뒤돌아 상대방의 얼굴을 살핀다. 이 무례한 인간이 어떻게 생겼나 하고.




난 영국인으로 트랜스포밍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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