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어딜 가서 조용히 있으면 '착하다' 또는 '참하다'라는 얘기를 듣곤 했다. 그냥 어른들이 인사처럼 해 준 말이었을 텐데 그때는 그런 말들이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 마치 케이크처럼 달콤한 그 말에 난 기꺼이 몇 시간 동안 착한 아이가 되곤 했다.
생각해 보면 늘 밖에서는 조용한 편이었다. 친해지면 정 많고 말 많은 왈가닥, 푼수, 사오정 성격이지만 그 단계를 넘어서기 전까지는 늘 말을 아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어느새 나만의 '관계 발달 단계도'를 마음속에 정립했던 것 같다.
영국인 남편과 결혼한 지 만 4년 반, 장거리 연애 기간을 포함하면 6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신혼 초, 둘이 있는 게 왜 그리 서먹했던 걸까. 장거리 연애 때와 달리 24시간 붙어 있게 되자 오히려 남편이 낯설게 느껴졌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그때 진짜 연애를 했다. 비로소 같은 공간에 앉아 상대를 진득이 관찰할 수 있었다. 서로의 사소한 습관들을 알게 됐다.
난 둘이 있게 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할 말이 있어도 영어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맛깔스럽게 영어로도 표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본의 아니게 많은 경우, 남편의 말에 미소로 응하거나 간단한 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다 보니 남편은 내가 무척 조용하고, 심지어는 화도 낼 줄 모르는 사람이라 생각했던 듯하다. 실제로 당시엔 그러했다.
둘이 신혼집을 꾸미던 때다. 오래된 집이라 관리가 잘 된 편이어도 크고 작게 손이 갔다. 방에 있던 벽지를 뜯어내고 페인트칠을 하려고 보니 벽칠부터 다시 해야 했다. 마트로 달려가 벽에 칠할 원료를 사 왔다. 벽을 덧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일일이 손으로 사포질을 했다. 손으로 이걸 언제 다 하나 싶어 사포질 하는 기계를 시댁에서 빌려 왔다. 기계를 돌리자 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숨이 턱턱 막혔다.
이건 시작해 불과했다. 방마다 그런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전기선 문제, 가구 배치 문제, 전 주인이 남기고 간 가구는 어떻게 할지, 버린다면 어떻게 방에서 꺼낼지 등등. 집 꾸미기는 끊임없는 고민거리를 안겨주었다. 조금씩 우리가 원하는 집에 되어가는 과정이었지만 그 진도는 달팽이 걸음마냥 더뎠다.
그러다 라디에이터(난방 시설)에 문제가 있음을 알았을 때 남편의 인내심이 극에 달했다. 내뱉는 불평에 다소 거친 말들이 섞여 나왔다. 옆에 있던 나에게도 불똥이 튀었다. 잠시 집을 구경하러 왔던 시댁 가족들은 그런 남편을 달래다 포기하고 돌아갔다.
난 화가 났지만 화를 내지 못했다.
우리 집 정원. 어느새 이 집에 산 지 5년이 되었다.
얼마 전, 유튜브를 보고 있었다. 최민수 가족의 일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강주은이 볼매였다. 갓주은이라고 불리는 그녀가 신혼 때 남편과 얼마나 소통이 어려웠는지 이야기했다.
"캐나다에서는 내 의견을 표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어릴 때부터 계속 어떻게 내 의견과 생각을 잘 표현할 수 있는지 연습해요. 오빠랑 결혼해서 얘기를 나누는데 오빠가 얘기를 굉장히 길게 해요, 그러면 나는 오빠가 얘기를 끝냈을 때 내 의견을 어떻게 근사하게 이야기할지 곰곰이 생각하죠. 그런데 오빠 얘기가 끝나서 내가 얘기를 시작하면 최민수 씨가 그래요. '주은아, 주은이가 더 얘기 안 해도 돼요. 오빠가 정리해 줄게.' 그때 깨달았죠. 아, 이 사람은 내 의견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구나"
이 얘기는 아이러니하게 내 상황을 역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난 반대로 너무 얘기를 듣고만 있어서 영국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영국 사람들은 대화할 때, 적극적으로 생각과 의견을 주고받기를 원했다. 마치 탁구대 위의 탁구공처럼 이 쪽에서 공을 치면 상대방은 맞받아쳐야 했다. 그러나 나는 종종 공을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몰라 떨어뜨리곤 했다. 내 의견과 생각을 다듬어 표현하는 연습이 부족했던 난, 늘 적절한 타이밍을 놓쳐버리는 것이었다.
컬리지 수업에서도 그런 나와 영국 사람들의 차이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난 주로 강사의 말을 경청하려고만 하는 데 반해 영국 친구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수업과 연결시킨다. 사실 영국 친구들이 수업 중 불쑥 자신의 이야기를 꺼낼 때 난, '수업 내용과 크게 관련이 있는 내용이 아닌데?', '왜 저런 얘기를 꺼내서 수업 내용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지?' 하곤 했다.
하지만 사실 누군가 끼어들어 이야기가 산으로 가게 하거나 엉뚱한 멘트로 웃음을 안겨 주어야 3시간 수업이 들을만해진다. 그런데 나에겐 그 끼어듦이 말처럼 쉽지 않다!
학창 시절,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외국에서의 수업을 동경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멍석을 깔아주니 못하고 있다니.
아직도 선생님의 말에 끼어들기가 어색한 나는 타이밍을 엿본다. 어쩌다 제대로 끼어들어 겨우 몇 마디를 내뱉으면 곧 모아지는 시선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곤 한다. 그래도 뿌듯하다. 괜히 혼자 어깨가 으쓱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