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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Jun 30. 2020

'요즘 젊은것들'이 문제일까?

 '웃음거리'가 되는 일본의 노인(곤자쿠모노가타리슈2)


일본 고전문학의 백미로 손꼽히는 <곤쟈크모노가타리슈(금석물어집 今昔物語集)> (편자 미상) 가운데 제28권은 본조 세속 편으로, 그 주된 내용은 '웃음'을 다루고자 한 것이다.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웃음이라는 것을 체계화하려시도'였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이 '웃음'이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상 '웃음거리'가 된 이야기들이다. 이른바 일본적 골계담인 것이다. 그런데 이 골계담을 읽다 보면 한국인으로서는 심정적으로 좀 불편해지는 부분들이 등장한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지금으로 보자면 옛날이지만, 엔유인(円融院) 천황이 퇴위 후, 고노 히(子の日)의 행사(정월 초 자일에 들에 나가 작은 소나무를 끌고 다니며 봄나물을 뜯어 장수를 축하)를 위해 후나오카 산(船岡山)에 납시었다.

……

(엔유인) 천황이 자리에 앉으니, ……모두가 자리에 앉았을 때 에보시(烏帽子)를 쓴 노인이 ……우타요미(歌読み)의 말석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앉았다.……소네노 타다요시(曽禰吉忠)였다. ……

전상인(殿上人;천황을 알현할 수 있는 신분)들이 이 행사의 한간다이(判官代;담당책임자)에게 “저 소탄(소네노 타다요시)이 왔는데, 불렀는가” 물어보자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하니, “그렇다면 누구 다른 사람이 명을 받들어 불렀는가” 물어보았지만, 그렇다는 사람이 없었다. 

한간다이가 소탄에게 다가가 “어떤 초대도 없었는데 와 있는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소탄이 말하기를 “우타요미(歌読) 모두 오라고 들어서 왔습니다. 어찌 오지 않겠습니까. 여기 온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는 몸이니까”

한관다이는 그 말을 듣고 ‘이 녀석은 초대도 안 했는데 왔구나’라고 생각하여 “어째서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온 것이요. 빨리 나가시오”라고 쫓아냈지만, 그럼에도 소탄은 태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때 호코인(法建院)의 대신(大臣;후지와라 가네이에藤原兼家)과 간인(閑院)의 대장(大将;후지와라 아사미츠藤原朝光) 등이 이 말을 듣고 “저 자의 목덜미를 잡아 내쳐라”라고 명령하자, 젊고 혈기왕성한 하위의 전상인들이 소탄의 뒤로 몰려가…… 소탄의 가리기누(狩衣)의 덜미를 잡고 쓰러트려 장막 밖으로 끄집어낸 것을, 전상인들이 한쪽 발로 7, 8번씩 밟았다. 

소탄은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도망가니, 전상인들의 젊은 수행자들, 고도네리 와라와(小舎人童;시중드는 아이)들이 소탄이 도망간 뒤를 쫓아가며 손뼉을 치며 웃었다. 말을 풀어놓은 것처럼 큰소리치며 쫓아가는 소란스러운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이것을 본 많은 노인, 젊은이 등 할 것 없이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

당시 사람들은 모두 이 일을 이야기하며 웃었다.

그렇다면 신분이 낮은 자는 이처럼 한심하다. 

요시타다는 와카는 읊을 수 있지만 마음이 깨닫지 못해서, 우타요미(歌読)들 초대에 초대 받지도 않았는데 와서 이런 부끄러움을 당하고, 많은 사람들의 웃음을 사서 말대에까지 이야깃거리가 되었다……(28-3화)     



초대 받지도 않은 와카 낭독회에 갔다가 젊은 하급 청년들에게 목 뒷덜미를  잡힌 채 끌려나가 발로 짓밟히고 도망 간 노인 소네노 요시타다.


<곤쟈크모노가타리슈>에는 이밖에도 

조정의 고세치 행사의 담당을 맡아 처음으로 상경한 노령의 오와리 국 장관이 촌스러운 꼴을 보이다 젊은 관료들의 놀림으로 웃음을 산 이야기(4화), 

말에서 떨어져 관이 벗겨져 나가 대머리가 드러났어도 당당하게  사람들에게 '도리'를 설명해 주려다 비웃음을 산 노인 기요하라 모토스케의 이야기(6화) 


등, 웃음거리가 되어 전해지는 노인들의 이야기가 다수 등장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노인들의 실수에 대해 손뼉 치며 놀리고  웃고 있으며, <곤쟈크모고가타리슈>의 편자 역시 이러한 노인들의 실수를 '이상하고 바보스런'태도라 비난하는 투로 맺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내용들을 들려주면 우리 학생들은 굉장히 낯설어한다. 감각적으로 둔해진 노인들의 실수와 이를 가차 없이 비웃어대는 세정의 이야기에 대해 공감하지도, 같이 웃지도 못하고, 편자의 의도를 알 수 없다며 난감해하는 것을  보니, 그래도 뭔가 한 줌 안심이 된다. 


나도 노인을 대하는데 별다른 공경 감이 없는 일본인들의 태도를 처음 접했을 때 적지 않게 당황했었다. 

일본에 처음 유학 갔던 해  여름방학, 지도교수와 대학원 사람들과 역사 세미나 여행을 갔었다. 숙소지 여관의 커다란 다다미방에 도착하자마자 젊은 학생들은 맨발로 벌러덩 누워 뒹굴고, 한쪽에서는 담배를 피워댔다. 그리고 그 틈바구니  한쪽 구석에 60대의 교수님이 얌전히 앉아계셨다.


그 속에서 내가 느낀 황당함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 나의 대학시절만 하더라도 노교수님들은 너무나도 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씀을 듣고자 하는 시늉이라도 했었던 것 같다. 

더군다나 나는 어린 시절, 상당히 엄격한 할아버지가 계신 환경 속에서 남녀가 밥상을 따로 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어른 앞에서 양말을 벗거나 눕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내가 젊은 일본 학생들의 그 같은 모습을  보자 속에서  화까지 올라왔다. "유학을 잘못 왔나 보나. 이런 상놈의 나라에서 무엇을 배울 것이 있단 말인가"하고  홀로 통탄하던 기억이 난다.


물론 지금은 그때와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의 역사 속에는 노인공경과 같은 유교의 이념들이 유입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의 관념의 잣대로 상대를 시비하는 것이 바른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생각해보면 기성세대에게는 언제나 '젊은 세대가 문제'였다. 늘 어느 시대나 '요즘이 말세'라고 해왔듯이.

기원전 5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 문명 유적지 점토판에는 "세상이 말세인가 봐. 요즘 젊은이들이 버릇이 없어"라는 노인들의 대화 기록이 남아있다. 이것을 알았을 때 나는 매우 깊은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고대 시기로부터 역사사료를 쭉 읽다 보면, 어느 시대에도 그 시대의 지식 노년층들이 "요새 젊은이들이 문제다"를 지적하는  부분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어느 시대에나 젊은이들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나이 든 분들'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젊은이들에 의해 펼쳐지는 새로운 경향과 문화가 잘 수용이 되지 않으니, 결국 그 젊은이들을 문제 삼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관념과 조금이라도 다른 상대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다. 자기가 살아온 삶의 경험으로  축적된 관념을 쉽사리 넘어서지 못한다는 말이다.


매해 새로 들어오는 학생들과 나도 나이 차가 더욱 벌어지고 있다. 그만큼 사고방식의 차이도 벌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학생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이야기를 해주어야 닿을지, 시대가 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더 난감해지고 있다. 

만약 이 학생들에게 "요즘 젊은것들은……"해 버린다면, 그 멀어진 마음으로 학생들과 절대 가까워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결국 나는 외로운 존재가 될 거다.


그래서 생각해 보게 된다. 

일본에서는 나이 든 사람이라고  무조건 공경해야 한다는 관념이 없다. 그러다 보니 시대에 뒤떨어지고 감각이 둔해진 노인들이 저지르는 실수나 고집들이 젊은이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사태가 일어난다. 

우리는 아직 노인공경을 어릴 때부터 가르치기는 하지만, 형식에 치우친 면이 클지도 모른다.

나이의 위계서열로 군림하려 해도, 이젠  '꼰대'소리 듣고 말 상대도 못 되게 될 거다.


나이 든 내가, 먼저 젊은이들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젊은이들의 '헤맴', 실수나 잘못, 또는 새로운 경향성 등을 이해하고, 시비 없이 그대로 보아주고자 하는 큰 마음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명상을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이런 상대적인 관점이었다. 나의 기존 관념들을 과감히 내려놓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 노력을 하다 보면 언젠가 젊은이들이 삶을 살다 헤매게 되었을 때, 누군가로부터 따스한 이해와 위로를 받고 싶어 졌을 때, 좀 대화하고 싶어 지는, 그런 노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면,  어깨를 당당히 펴고 세월이 가도 두렵지 않을 것 같다.


*그림은  12세기 <信貴山縁起絵巻>  朝護孫子寺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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