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쟈크모노가타리슈3)
인류문화가 남긴 행적을 들어다 보면, 생존의 ‘삶’ 못지않게, 그 종결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각양각색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 또한 각기 그 집단 나름대로 형성하고 보유해 간 엄중한 관념, 관습의 세계를 엿보게 된다.
<곤쟈크모노가타리슈>31-30 ‘오와리 국의 장관(尾張守), 도리베노(鳥部野)에 사람을 내친 일’이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가인(歌人)이면서 마음가짐도 우아한 여자인데……, 남편도 없이 지내고 있었다. 오와리 국의 장관은 이를 딱하게 여겨 지역의 군(郡) 등에 맡겨 경제적 편의를 돌보아 주었다.……나이가 들어 쇠하게 되자 여승(尼)이 되니, 그 뒤로는 오와리 국 장관도 뒤를 봐주지 않게 되었다.……날이 갈수록 병이 깊어져……그 오빠가 있어 ‘우리 집에서 죽게 할 수는 없다’라고 생각하고, 예전 친우가 있는 기요미즈 절(清水寺) 근처로 데려가 부탁하려고 차(우차)에 태워 갔는데, 그곳에서도 "여기서 죽게 할 수 없다"라고 말하니, 어찌할 수 없어 도리베노(鳥部野)에 가서 깨끗한 고려단(高麗端)의 다다미(畳)를 깔고 거기에 앉혔다. 극히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이라, 그늘진 아래 몸을 단정히 하고 다다미에 앉아 있었다.……
딱한 일이라고, 당시의 사람들은 말하였다."이는 누구인지 신원이 확실한 사람이지만, 안됐으니 누구인지 기록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그 오와리 국 장관의 처(妻)인지, 여동생인지, 딸인지 알 수 없다. "어쨌든지, 극히 유감스러운 일이라 누구의 일인지 묻지 않은 것이다"라고 이야기 전해 들은 사람들은 말을 전해온다.
‘집에서 죽게 할 수 없다’는 당시의 게가레 관념에 의해, 도리베노에 버려지게 되는 여인의 이야기는 흡사 우리나라 고려장의 풍습을 떠올리게 한다.
헤이안 시대에는 신분이 있는 자는 화장(火葬), 그렇지 않은 자는 들판에 버려지는 것이 일반적인 장례법이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에도, 죽음을 눈앞에 두었다고 판단되면 이와 같이 버려지게 되는 것이었다. 남은 다른 사람들이 ‘죽음의 게가레’를 회피하고자 하는 의식 때문이다.
산 자를 버리는 것이 딱하고 안 된 일이라 생각은 하면서도, 사람들의 의식이 관념 속에 일단 고정되어 버리면, 무엇이 바름인지 판단할 겨를도 없고 깨닫지도 못하고, 그 관념의 노예가 되어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이러한 기록은 말해 준다.
<곤쟈크>31-29편에도 또한 이러한 ‘죽음의 게가레’의 이야기가 있다.
엔유인 천황(円融院天皇) 때에……덴죠(殿上; 헤이안 경, 다이리(内裏) 세이료덴(清涼殿)의 남쪽 공간)의 저녁식사 때 덴죠비토(殿上人, 천황에 알현할 수 있었던 사람들), 구로우도(蔵人, 황실의 문서나 도구를 넣어둔 창고 관리역) 몇 명이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구로우도 시키부(蔵人이면서 式部省)의 3 등관(丞)인 사다타카(貞高)가 (식사하던 중 고개를 식기에 파묻고)……슈도노 츠카사(主殿司;궁중의 청소, 점화 등 담당)가 다가가서 만져보고 "뭐야 죽었잖아"라고 말하니, 덴죠의 저녁식사 자리에 있던 모든 덴죠비토, 구로우도 등이 일제히 일어나 모두 저쪽 편으로 달아나 사라져 버렸다.……
‘죽음의 게가레’ 앞에 쏜살같이 피해 달아나버리는 헤이안 귀족들의 모습인 것이다.
‘게가레(穢)’란 물건, 사람, 장소 등을 기피하는 관념으로, 위험한 주력(呪力)을 지닌 피, 신비적 현상이라 관념 된 죽음, 출산을 두려워함이 본래의 뜻이다.
이 ‘게가레(穢れ)’에 대한 규정이 이미 대보령(大宝令;701년 제정)의 편목 중 하나인 신기령(神祇令)의 조문으로 형성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헤이안 시대가 되면, 보충 법인 각종의 시키(式)가 편찬되는데, 820년 편찬된<고닌시키(弘仁式)>(현존 않음) 일문(逸文)을 보면 사람과 동물의 죽음과 출산을 ‘혐오(嫌惡)’로 규정하고 있으며, 육식, 조문, 병문안과 더불어 그것들과 접촉했을 때에 조심해야 할(삼가야 할) 일수가 정해졌다(사람의 죽음은 30일, 출산은 7일, 가축의 사망은 5일, 출산은 3일).
<죠관시키(貞觀式)>에 이르러 수정되어 ‘게가레’라는 용어로 바뀌고, 발생 장소에서 사람의 이동에 의해 전염한다는 쇼쿠에(觸穢) 규정도 더해지게 되었다(화재 등에 의한 실화의 게가레(失火穢)도 7일의 기(忌)).
이들이 모두 10세기의 <엔기시키>(권 3, 신기(神祇) 3, 임시제(臨時祭)편)를 통해 다시금 정리되는 등, 게가레의 관념은 일본인들의 머릿속에 깊이 뿌리 내려지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에는 게가레에 의해 중요한 국가의 신사(神事;제사 등)가 중지되는 일이 다반사였다.
심지어 조정 안의 개가 출산을 해도 조정의 공식 일정이 변경되었다. 게가레를 가까이하면 '신이 벌이 내린다'는 등의 관념도 형성된다.
특히나 ‘죽음의 게가레’로 절대 피해야 하는 것이었다. 승려라도 어떤 친한 사이라도 화장 장소까지 같이 가는 일은 절대 없었다고 한다(절이 죽은 자의 조(弔)를 행하기 시작한 것은 10세기 중반 이후(岩井宏實<日本の神神と仏>).
강력한 게가레 관념은 귀족, 서민 등 모든 이들의 일상생활, 의식의 구석구석까지 지배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후지와라 미치나가의 <미당관백기(御堂關白記)>, 후지와라 사네스케의 <소유기(小右記)>, 후지와라 유키나리의 <권기(権記)> 등, 11세기 헤이안 귀족들이 남긴 일기 속에는 그 같은 ‘게가레’를 회피하기 위한 각종의 ‘조심’스런 노력들의 기록들이 넘쳐난다.
‘게가레’가 ‘전염된다’고 하는 생각은, 무엇보다도 역병에 의한 피해가 만연하였던 일본 사회와 배경을 함께 한 의식이었다. 이는 게가레가 존재하는 장소에 같이 있게 되는 것조차도 극단적으로 회피하게 되는 관습을 형성시켰다. 자신이 이러한 게가레의 전염에 의해 피해를 입을 수 있음을 지극히 두려워하는 공포 의식, 피해 의식이다. 가족 친지는 물론 누군가의 죽음과 같은 상황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가차 없는 ‘기피’의 선택이,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인간 삶의 한 장면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 '게가레'의 관념을 긴 시간 속에 간직한 채 일본인들이 살아왔던 것이다.
*그림은 <분하사 연기 에마키(粉河寺縁起絵巻)> 병에 걸린 여인(12세기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