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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Jul 24. 2020

성은 야한 것인가?

(유학기3)

 


 내가 일본에서 살던 동네는 네즈(根津)라는 시타마치(下町;서민동네)였다. 이러한 시타마치에는 보통 센토(銭湯)가 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동네 목욕탕이다. 

매일 저녁 일정한 시간에 센토에 가서, 하루의 피로를 푸는 것이 유일한 휴식이자 낙이었던 것 같다. 동네의 일본 사람들이 한 달 치씩 표를 끊어 가격 할인을 받는 것을 보니, 그네들도 그러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센토는 여탕과 남탕의 입구는 각기 다르지만, 일단 들어가면 탈의실 안에 계산대가, 남탕과 여탕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조금 높은 단의 계산대에 앉은 사람은, 남탕과 여탕 양쪽에서 들어온 사람의 돈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양쪽의 탈의 장면을 다 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계산대에 아줌마가 앉아있는 날은 괜찮았지만, 어느 날 가니 아저씨가 턱 앉아 있었다. 돈을 지불하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탈의를 하자니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같은 탈의실에 있던 다른 여자들은 별로 개의치 않는 얼굴로 옷을 벗거나, 탕에서 나와 옷을 입고 있었다. 엄청 난감했지만, 다른 여자들 틈에 뒤섞여서 구석 쪽에서 쪼그라들며 후따닥 벗고, 입기를 했다. 


며칠인가 지나니까 나중에는 나도 별로 개의치 않게 되었다. 물론 그 아저씨의 시선은 늘 앞쪽의 TV를 바라보고 있었고, 보아도, 보여도, 보지 않은 ‘후리(ふり, 척, 체)’를 하는, 일본인들의 보편적인 예의를 잘 차려주고 계셨다. 


여담이지만, 한국 남학생이 센토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벼르다가 마침내 어딘가 동네의 센토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했다고 좋아했었다. 

몇 달인가 지나서 그 남학생 주위에 몇 명의 한국 유학생들이 둘러앉아 센토 아르바이트가 어떠했냐고 물었다. 처음 며칠은 재미있었는데, 그 뒤 맨날 똑같이 동네 사람들 벗은 몸 보는 게 재미 없어지고, 앉아서 TV 보는 게 지겨워져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아하, 그런 거구나"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난다.


 일본에서는 에도시대에도 대중욕을 ‘이리 코미(入翔;남녀가 뒤섞여 목욕하는 것)’라고 불렀듯이, 본래 남녀 혼욕을 의미했다. 에도에만 해도 600여개의 유야(湯屋)가 존재했다.

 1791(寛政3)년 막부는 풍속 단속을 위해 법적으로 혼욕을 금지하였다. 그럼에도 일소되지는 못하였다. 지금도 노천부로(야외 목욕탕)에 가면, (수영복 비슷한 것을 걸치기도 하지만) 혼욕탕이 존재한다. 

19세기 막부 말기에 미국인 페리 제독을 따라 일본에 왔던 하이네는, 일본의 혼욕 풍습에 대해  “도덕심에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간자키 노리타케, 김석희 역 <습관으로 본 일본인의 문화>). 


사실 ‘남녀유별’의 관념을 머리에 새기고 살아왔던 나도 처음에는 일본의 이런 풍속이 의아스러울 뿐이었다. 

하지만 고온다습한 일본에 살면서 저녁 한때 깊은 탕에 목까지 몸을 푹 담그는 것이 얼마나 온몸의 피로를 풀어주는, 빠트릴 수 없는 중대한 일이었던가 생각해 보면, 각자 개인 목욕탕을 가질 수 없었던 시타마치의 서민들이 즐겼던 혼욕의 문화에 대해 나름 이해해 보려 하게 된다. 



본의 원시 법에는 본래 '구니츠츠미(国つ罪)'와 같이 - 주로 근친상간에 관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성에 대한 터부, 금기도 존재하였다(<엔기 시키(延喜式)>오하라에 고토바(大祓詞)에 보이는 기모범죄(己母犯罪)・기자범죄(己子犯罪)・모여자범죄(母与子犯罪)・자여모범죄(子与母犯罪)・축범죄(畜犯罪) 등).


유럽에서는 중세 그리스트교 시대의 영향으로 인간 삶에서 성이 한쪽에서 금단(禁斷)의 영역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금욕의 관념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니, 오히려 이에 반발하여 18세기가 되면 성의 전면적 개방을 주장하는 자유연애 찬양론을 낳았다.

 

20세기가 되면 성자체가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올라와 성적 환상-환타즘 등으로 논의되었다. 프로이트파가 등장해 무의식의 심리학을 통해 모든 인간 활동의 근저에 리비도(libido, 성적 욕망)가 존재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이른바 에로티시즘의 과학, 철학이라고도 불린다. 


살펴보자면 인류의 모든 문화의 전통, 신화, 풍속, 종교, 예술 속에 성적 이미지가 뿌리 깊게 반영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에 특히나 일본은, 유교적 관념에 의한 제재도 없는 바, 윤리 면에서의 논의도 없는 바, 이러한 에로티시즘을 무기 삼아 실컷 성의 대중화, 상품화를 성행시켜왔다. 

오늘날 영화, TV, 만화에 이르기까지도 성을 소재로 한 온갖 대중매체물들이, 특별한 제재 없이 여기저기 하루에 수도 없이 눈에 띄고, 귀에 들어온다. 그러다보니 웬만한 것 보아도 무감각해졌다.


 에로티시즘이라는 용어의 뜻이 ‘성적인 이미지를 의식, 무의식으로 환기하는 일’로 정의되는 만큼, 이는 본질적으로 심리적인 연유에서 발생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도 또한 인간이 보거나 듣거나 경험하면서 뇌에 찍어놓은 '사진'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그 성적 ‘이미지’, ‘사진’의 껍질을 벗겨 버리면, 거기에는 더 이상 성적 호기심을 야기하는 환타즘이나 에로티시즘은 없다. 예전에 TV에서 다큐 ‘아마존 강의 눈물’ 인가도 시청했지만, 발가벗고 성기가 드러나는 모습으로 평범하게 일상을 사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남녀혼탕이나 네즈 센토 같은 문화도 별문제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환타즘이나 에로티시즘같이 인간의 성을 주 대상으로 삼는 20세기 이후의 성과학과 그로 인해 파생된 오늘날까지의 성 풍조는 사실상, 인간 삶의 경험에 의해 형성된 의식인 허상의 ‘환(幻)’을 다루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성적 욕망이 허상의 ‘환’에 의한 것이라면, 앞으로 거기에 큰 가치와 의미를 둘 필요는 없을 듯하다. 성은 야한 것이 아니고, 야하다는 생각의 ‘환’이, 그리 착각을 일으키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환’에 뒤덮이면, 몸 마음이 건강할 수가 없다. 일본에서 살 때도 느꼈지만, 성을 지나치게 상품화 한다든지, 성적 환상이 강조되는 사회는 아무래도 건강한 사회는 아닌 듯싶었다. 특히나 자라나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보다 정신적으로 건강해질 수 있는 방향으로 모색해 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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