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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Jun 09. 2020

‘북 로-드’, 책 입수에 목숨을 걸었던
일본


                          

 중국의 역사학자 왕용(王勇)씨는, 고대 일본인이 중국에 와서 활발히 서적을 구입해 갔던 사실을 거론하며, 중국에서 일본으로의 ‘북로드(Book road)’라는 명명을 하였다. '실크로드'에 빗댄 표현이다(王勇 <シルクロード と ブックロード>).


고대의 일본인들이 대륙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려고 했던 점은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특히나 서적의 입수에 유별났다.


<경적후전기>(経籍後伝記;<선린국보기(善隣国宝記)> 인용)의 기록을 보면,     


 “스이코 천황(推古天皇) 12(604)년 정월 1일, 처음으로 역(暦)을 사용하였다. 이때에 국가에는 서적이 아직 적었기에 이노노 이모코(小野妹子)를 수(隋)에 파견하여 서적을 사들이게 하고, 또 수(隋)의 천자를 방문하게 하였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또 <구당서(旧唐書)>일본전(日本伝)을 보면,      


“개원 연간(開元年間) 초기에 또 견당사(遣唐使)가 내조하여,……당 황제로부터 받은 석뢰(錫賚;布帛類인가) 모두를 문적(文籍)을 사는데 쓰고 바다를 건너 돌아갔다” 는 기록이 보인다. 


수, 당조 이래로 일본이 중국으로부터 열심히 서적을 구입하여 갔던 상황을 알 수 있으며, 중국인들도 그 점을 특기하고 있다. 


일본의 <속일본기> 기록에 의하면, 8세기의 유학승 겐보(玄昉)는 당에 건너가 불서(仏書)5천권 이상을 실어 왔다고 한다. 또 유학생 기비노 마키비도 <당례(唐礼)>130권을 비롯하여 <대연력경(大衍暦経)>, <악서요록(樂書要錄)> 등 150여 권에 달하는 서적을 가지고 돌아와 조정에 바쳤다고 한다(735년 4월 26일). 정창원문서(正倉院文書)의<봉사일체경소게(奉写一切経所解)>(761)의 내용을 통해서도 견당사가 가져온 서적 목록을 확인할 수 있다(총 24부, 7부 결권). 

  

아울러 <일본국견재서목록(日本国見在書目録)>(후지와라 스케요(藤原佐世) 찬)이라는 책이 전해 온다. 이는 9세기 말기까지 중국으로부터 일본에 가지고 돌아와, 당시 현존하고 있던 한적(漢籍, 불교 경전 제외)의 목록을 기록한 책이다. 그 안에 기록된 서적의 수가 1578부 1만 6997권 정도에 이른다. 이는 추산하기로,  당시 당나라의 장서(蔵書)의 약 반수 정도가 되는 서적의 양이라 한다. 


 당시는 미숙한 선박 기술과 풍해 등으로 인해 견당사(당으로 파견한 사절)의 배가 반 수도 못 돌아오는 위험한 항로를 하던 시대였다. 보통 견당사선을 '4척의 배'로 구성하여 나누어 탄 것은, 그중 어느 하나라도 무사히 돌아오길 바랐던 생각에서였다. 특히나 신라와의 관계가 악화된 8세기 중기 이후에는 위험한 남도해 항로를 이용하다 배가 난파되거나 외지에 표착되어 많은 인명을 잃었다. 이같은 위험천만의 상황 때문에 조정의 웬만한 관료들은 견당사로 파견되는 것을 꺼렸다. 병을 빙자해 출발을 늦추다가 차라리 귀양살이를 가기도 하였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이 정도의 많은 책을 가져왔다는 것은, 서적의 입수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였던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입수했던 책을 바탕으로 일본은 열심히 중국식 문화, 체제 따라가기를 해왔다. 그들의 역사가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물론 그러한 분위기가 헤이안 중기 이후 귀족들이 지나친 예의 작법 문화로 흐르는 경향을 낳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본이 고대국가로의 출발이 상대적으로 뒤늦었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발전을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노력의 결과라는 점이다. 그 속에서 정사인 육국사를 비롯하여 헤이안 귀족들의 일기류 등, 그들 자신의 수많은 기록문화도 더불어 남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그 결과 나는 지금도 그것들을 섭렵하느라 고생스럽기는 하다.


역사적 전란 속에 중국은 많은 서적들이 소실되었고, 여기저기 산재하고 있는 형편이다. 청말부터 민국 초기 시기에는 오히려 일본으로부터  '일존서(佚存書)'의 형태로 되보내졌다고 하니,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이다.     

  

동경대학 재학 시절 대학원 세미나 때 율령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였는데, 그 율령의 원산지인 중국에는 정리된 율령이 없었다. 군데군데의 산일한 자료를 하나씩 찾아내서 <당령습유(唐令拾遺)>로 정리한 것도 일본인 학자 니이다 노보루(仁井田陞)씨였다. 일본인 학자 손에 모아진 자료를 통해 중국의 학자가 자국 역사 속의 율령을 연구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지금도 동경의 진보쵸(神保町)의 즐비한 고서점가의 풍경은, 세계 어디에다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일본의 자랑거리가 되어 있다. 명실공히 'book road'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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