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역사 속에서 영위된 정신활동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점복(占卜)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점복, ‘우라나이(占い)’라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일본이다.
오차노 미즈(お茶の水)의 여자 대학가를 걷다 보면 어느 틈에 1, 2명의 여성이 다가와
“데소(手相, 손금)를 보여 주시겠습니까?”하여, 보여 준 적이 몇 번 있었다.
나의 상황, 미래를 은연중에 불안해하는 심정이 근저에 있으니, 호기심 반을 섞어 생전 모르는 그녀들에게 손바닥을 펼쳐 내보였던 것이다.
고도의 과학시대를 산다는 나도 이러할진대, 그 옛날의 사람들은 나보다 더더욱 이러한 ‘우라나이’의 세계에 마음이 이끌려 갔으리라는 심증(?)을 해본다.
일본, 아니 그 이전의 2세기 후반경의 왜국(倭国)의 시절은 서로가 무리 지어 싸우는 대란(大亂)의 상태였다. 이를 통일하여 나라를 안정으로 이끌고, 중국의 위나라에까지 사절을 보내 그 존재감을 과시했던 인물은 바로 여성 무녀, 샤먼적 여왕 비미호(卑弥呼)였다는 점을 상기해 보게 된다. 그녀는
“귀도(鬼道)에 통하여 사람들을 능히 미혹시켰다”( <위지왜인전(魏志倭人傳)>)하니,
그녀의 힘은 바로 점복술이나 주술이었던 것이다. 이 비미호와 동일인물이 아닐까 일본 학계에서 거론되기도 하는 것이 <일본서기>의 신공황후(神功皇后)이다. 그녀는
“보물의 나라(신라)를 치라”
는 신의 계시를 받든, 다시 말하면 빙의에 걸려 받은 신탁을 수행하여 성공한 인물로 기술되어 있다. 이 또한 무녀적 존재라는 추측이 어렵지 않다. 다시 말해 일본 역사의 서장은 이렇듯 무녀적, 주술적 능력을 가진 여성에 의해 힘입은 바 크다.
일본에 불교가 유입된 초기에 여성 출가자(비구니)가 비교적 많았던 것도, 또 고대에 여성천황의 재위 기간이 3분의 1 정도나 되었던 것도, 여성들의 힘이 표면에 직접 드러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신비하고 주술적인 무녀적 능력에 대한 전사(前史)가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 같은 일본적 점복술은 8세기 이후 대륙의 통치체제와 법률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중국의 서복(筮卜;거북이 등짝을 태워 점치는 것)에 자리를 밀려 이른바 ‘사도(邪道)’로 분류되게 된다.
8세기 나라(奈良) 시대, 당대의 유명한 학자, 정치가였던 기비노 마키비(吉備真備)는 그의 자손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가훈서(家訓書)를 남겼다( <사교유취(私敎類聚)> ).
그는 “(중국 전래의) 서점(筮占)을 알아야 한다”(제34조)라고 주장한다.
당송(唐宋) 시대에 성행했던 안씨가훈(<顔氏家訓> 北斉의 顔之推)을 인용하며,
“복서(卜筮)는 성인의 업(業)이다”라고 이야기한다.
“단지 근래에는 더욱이 좋은 스승이 없어서 적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지적하며,
“옛적에는 복(卜)을 통해 의심 나는 것을 결정할 수 있었는데, 요즘 사람들은 복(卜)을 의심한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앞서 당시 일본 귀족 지식인의 인식을 실감 나게 엿보게 하는 것이 제31조이다.
“사무(詐巫, 가짜 무당)를 이용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정사요략政事要略>권7, 蟲毒延厭魅及巫覡)
이라는 가르침을 자손들에게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 내용인즉 다음과 같다.
사무(詐巫)의 무리는 동리 사람들(里人, 민간)이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참의 무격(巫覡, 巫는 여자 무당, 覡은 남자 무당)은 관이 관리하고, 신험(神驗)이 분명하여 일부러 말할 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 자손들이 사무(詐巫)를 즐겨 이용하고 무언(巫言)을 자세히 듣는 데에다 어찌 이같이 낭비를 하는가.
또한 생로병사는 당연한 이치다. 하늘 아래 생을 얻었다면 어떤 존재가 죽지 않겠는가.
사무사도(詐巫邪道)가 어찌 갱생을 얻으리오.
왜냐하면 무녀(巫)의 자손이 어찌 요절하는 것이며, 무녀(巫)의 가도(家道)가 어찌 빈궁해지는 것인가.
자신도 이루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이의 원(願)을 이루어주랴.
부디 이 뜻을 알고 사무(詐巫)를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
똑같이 점복, 점술을 행하는데 공식으로 관이 관리하는 무격은 인정하고, 민간에서 활동하는 무녀는 인정하지 않으며 자손들에게 적극 조심시키는 위와 같은 모습에는, 중국의 학식을 배워와 조정의 지식을 선도하던 관리가 빠져 있던 인식적 편견의 한틈이 발견된다.
그러는 한편 일본 고대의 귀족 지식인이 남긴 육국사(六國史) 안에는 수많은 점복 기사가 넘쳐난다. 예컨대
“사이다이지(西大寺)의 서탑(西塔)이 진동하여…… 이를 점(卜) 치자니”, “오우미국(近江国) 시가군(滋賀郡)의 오노노 야시로(小野社)의 나무를 잘라 서탑을 만든 것에 대한 저주였다”(<속일본기>772년4월조),
“이상 풍우로 나무가 뽑히고 집이 부서져…… 이를 점치니”, “이세(伊勢)의 쓰키요미 가미(月読み神)가 저주를 한 것이었다”(동 8 월조)라는 식이다.
유교는 샤머니즘적 무녀를 배격했지만, 그러한 유교적 영향이 적었던 일본에서는 불교와 결합된 점복술의 힘이 비교적 많은 활약을 해 온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러한 점복은 사도승(私度僧)과 같은 종교적 사회활동가들이 민간 속에서 행한 의술의 하나였다는 점( <일본영이기>上26,28,31화 등) 등을 상기해 보면, 어떤 시대에는 이런 것이 최첨단의 의술이자 과학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총체적으로 이 같이 점복은, 그 능력자가 당시대의 중요한 사회적 역할 수행자였으며, 시대인의 정신세계에 영향을 끼친 중요한 기술이었음은 틀림이 없다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중국식 고급진 점복을 행한 것이라 할지라도, 당시의 이러한 것들을 지금 사람들이 보면 참으로 어리석다고 생각될 수 있다. 나는 이러한 기록들이, 우리 시대에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지식, 인식적 판단의 위험성에 대해 재고해 보라고 알려주는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이 같은 ‘우라나이’가 어떤 시대에는 당대의 지식인이, 조정에서 선택한 최고의 해결책의 하나였다. 우리 시대에 우리가 옳다고 여기는 지식적 사고, 최고로 생각하는 해결책들은 언젠가 미래사회에는 불필요한 것으로 전락되지는 않을까. 지식을 중히 여기는 삶을 사는 입장으로서는, 우리 시대에 진정 필요한 지식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어느 시대의 인간도 "자기가 아는 것이 다이다." 우리의 인간사가 어느 한 때 ‘우라나이’에 그 판단을 맡겨 왔듯이.
그것으로밖에 판단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기가 모르는 상황에 대해서는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며,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쉽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시대는 내가 모르는 경험이나 세상에 대한 유연성, 수용력을 가져야만 성공할 수 있다. 내가 아는 것만 맞다고 하지 말고, 세상 누구에게도 통용되는 보편적인 이념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본말로 ‘우라나이(うらない, 占)라고 하면 ‘うら(裏)をする’ 즉, 인간의 오감으로 파악할 수 없는 <우라, 감추어진 속>의 영역을 안다는 뜻이다. 우라나이의 결과에 대해, 이를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주술(呪術)이었다(小松和彦「占いの精神史・断章」『is』 72, 1996).
*사진;주석 막대(錫杖)를 휘두르는 난심(亂心)의 무녀(<北野天神縁起>동경국립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