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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Jun 19. 2020

천년의 귀족을 만든 나라

-후지와라 미치나가-


"이 세상은 내 세상이라 생각한다. 보름달이 어디 하나 찌그러진 곳이 없듯이"     

                                           (此世をは我世とぞ思ふ望月のかけたる事も無しと思へは)


이 유명한 ‘망월가(望月の歌)’를 지어 부른 이는 누구인가.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 와카(和歌)의 주인공은 후지와라 미치나가(藤原道長)이다. 

그는 이른바 ‘일본의 역사를 움직인 사람들’ 베스트 몇 명 안에 꼽히는 인물이다.     


미치나가가 이 노래를 읊었던 날, 그 현장에 있었던 귀족 공경(公卿) 오노노 사네스케(小野実資)는 그의 저서 <쇼유키(小右記)>(寛仁2(1018)年10月16日)속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오늘은 뇨고(女御) 후지와라 이시(藤原威子)를 황후로 세우는 날이다. 전 태정대신(太政大臣,미치나가)의 셋째 딸이다. 일가삼후(一家三后;태황태후, 황태후, 황후. 이들은 모두 미치나가의 딸들)를 세우는 것은 아직까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미치나가는 ‘망월가’를 부르고 나서, 이에 답하는 와카를 지어 부르도록 요구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사네스케는 


“이 노래는 굉장히 아름다워서 도저히 그에 대답할 노래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하고는, 

“자, 모두가 단지 이 노래를 소리 높여 읊읍시다” 하여, 그 자리에 참석했던

 “모두가 이에 찬성하고 몇 번이나 되뇌이며 읊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미 확고해진 미치나가의 권세에 대해 그 누구도 반발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역사에 있어서 후지와라 가문은 천황가의 모계집안으로 그 기반을 잡기 시작한 것이 이미  8세기 쇼무(聖武)천황 시절부터이다. 

쇼무천황의 생모 후지와라 미야코(藤原宮子)와 쇼무의 부인(皇后) 고묘시(光明子)는 둘 다 후지와라 후히토(藤原不比等)의 딸이었다. 즉 쇼무천황은 이모 되는 사람과 혼인을 한 것이다. 이는 이후로 후지와라 후히토와 그의 아들들의 강력한 정권기반 형성에 초석이 되었다. 

조정 간부였던 4명의 아들들이 역병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모두 사망했어도, 그 후손으로 후지와라 나카마로 같은 인물이 득세하여 8세기 중반의 일본조정을 좌지우지하였다. 


많은 정적들과 그 일족들을 모반 음모의 ‘혐의’를 물어 제거하는, 피비내 나는 정쟁의 과정을 거쳤음은 물론이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이렇듯 미치나가 시절에는 3명의 딸들이 나란히 후궁(後宮)을 점유, 3천황의 외가로서 정권의 반석을 쌓게 된 것이다. 

미치나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고이치죠(後一条)천황의 외조부로서 조정 최고위의 섭정의 자리에 앉은지 1년 반 만에 은퇴를 선언한다. 그 지위를 장남 요리미치(頼通)에게 확실하게 물러주기 위해서다. 마치나가 자신은 표면에서는 은퇴하지만 사람들에게 오토노(大殿)라 불리며 그의 지시를 받도록 만들었다.

 

뒤에 원정(院政)시대가 되면, 요리미치의 아들 모로자네(師実), 그의 손자 타다자네(忠実)도 섭관(摂関)의 자리를 나온 후 오토노라 불리며 섭관가(摂関家)의 가정(家政)과, 궁정 내외에서 위세를 부리는 일종의 은거(隠居)정치를 행하였다. 

당시 천황가에서는 천황이 일찍이 양위한 뒤, 원정(院政)을 통해 법과 관습에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전제정치를 펼쳤듯이 말이다. 

후지와라 미치나가 <紫式部日記絵詞>(藤田 미술관 소장)



이후에도 미치나가 집안은 일본의 역사에서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의 자손은 미도류(御堂流)라 불리며, 그 적류(嫡流)가 섭정,관백(関白)이 되는 시스템이 정착화 되었고, 셋칸가(摂関家),혹은 고셋카(五摂家)를 형성하며 귀족사회의 톱의 자리를 지켜나갔다. 언제까지? 


장장 천년 이상의 세월에 걸쳐서이다. 1920년대에 들어서는 집안의 후손, 공작(公爵)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가 일본수상 총리대신(総理大臣)이 되었다.      


일본은 이렇듯 천년 세월의 귀족을 만들고, 보유해 온 나라이다. 

중세, 근세에 걸쳐 권력을 잡았던 무가세력이 귀족 공가를 뛰어넘을만한 계급적 성숙을 이루어내지 못했던 것도 이러한 역사를 만든 원인의 하나로 꼽을 수 있겠다. 아니 그보다도 그 무가의 수장(장군)들 자체가 황족과 연결된 핏줄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기에 존립할 수 있었던, 근본의 시스템이 일본의 역사에는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천년 귀족은 사라지지 않고, 무가시절 700년을 뛰어넘어 현대에까지 맥을 이어왔다. 


언젠가 일본tv를 보니까 현대에도 도심 가운데 정원만해도 3천 평이 넓는 대저택의 보유자로 존재한다. 그 후손 중의 한 젊은이가 인터뷰에서 말한다. 


“천황폐하를 지켜드리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화려한 변모를 거듭해 온 역사를 지닌 듯 보이지만, 이렇듯 한쪽에서는 고대 이후로 철저한 신분적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고 왔다. 그 구심점에 천황제가 있다. 

일본 천황제의 존립여부에 대한 논의는, 일본사회에 대한 훨씬 더 복잡하고 근본적인 문제에 닿는 사안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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