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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Jun 23. 2020

일본인의 자국 의식

우리는 보통,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자신에 대한 자각이 시작된다고 한다. 

일본은 언제부터, 어떻게 자국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을까?


<일본서기(日本書紀)>(720년 성립) 흠명(欽明)13년조 10월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백제왕이 불상 등을 전하면서 ‘멀리는 천축(인도)으로부터 여기 삼한(三韓)에 머무르기 까기, (불교의) 가르침에 의해 받들어 모셔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고 말하니,…… 소가노 이나메(蘇我稲目)가 ‘서번 제국(西蕃諸国)이 모두 동일하게 예를 다합니다. 도요아키츠 일본(豊秋津日本)만이 어찌 홀로 등을 돌리겠습니까’하였다.”


불교라는 세계 보편 종교를 받아들임에 있어 우리 일본도 빠질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서번 제국’ 즉 한반도의 나라들을 의식하면서 일본의 자국 인식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일본의 자국 인식은 고대 시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822년경 완성의 <일본영이기>(약사사(藥師寺) 승려 게이카이(景戒))서문에서는  

      

“옛적 한지(漢地)에서는 명보기(冥報記)를 기술하고, 대당국(大唐国)에서는 반약험기(般若験記)를 기술하였다. 어찌 오로지 타국의 기록만을 삼가 존중하고, 자토(自土)의 기이한 일(奇事)을 믿어 두려워하지 않으랴 ……”


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그 뒤 <대일본법화경험기(大日本法華経験記)>(1044년경, 사문(沙門) 진원(鎮源))의 서문에서도 보여진다.      


“거당(巨唐)에 숙법사(寂法師. 송나라의 의숙(義寂))라는 자가 있어 험기(験記)를 만들어 세간에 유포하였다. 보자 하니 우리 조정(我が朝)에는 고금을 통해 아직 이러한 기록을 한 적이 없다.”      


즉 당시 일본의 식자들이 중국 서적물에 관심을 가지면서, 중국의 것과 비교하여 ‘우리’의 것을 저술하고자 하는 의식이 커갔음을  알 수 있다. 무릇 정사인 <일본서기>를 비롯하여, 위의 <일본영이기><대일본법화경험기>등과 같이, 대부분의 서적의 이름에 일부러 ‘일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식하며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 목적성을 가진 편찬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사 <일본삼대실록> 속에는, 신라 해적에 대한 위기 의식이 깊어가는 가운데 ‘우리 일본조(日本朝)는 신명(神明)의 나라’(貞觀2(860)년)라고 주장하는 부분도 발견된다.   


특히 10세기 이후가 되면 자국 의식을 반영한 많은 작품들이 출현하였다. <고금화가집(古今和歌集)>이나,  일본적 불교 이해를 나타낸 <삼보회(三宝会)>, 또  <일본왕생극락기(日本往生極楽記)>를 비롯한 수많은 일본편 극락왕생담이 연이어 나왔다. 

 

이때에는 외부세계를 '이국(異国)'이라 부르며 강한 경계심을 형성하는 가운데, 자국에 대해서는 '본조(本朝=일본)'라 부르는 의식도 정착된다. 11세기에는  <본조려조(本朝麗藻)><본조분취(本朝文粋)><본조고승전((本朝高僧伝> 등과 같은 이름의 편찬물들이 나왔다. 12세기 무렵 성립의 <곤쟈크모노가타리슈(今昔物語集)> 시, 천축(인도), 진단(震旦, 중국), 본조(本朝=일본)의  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와 중국과 비견되는 일본(=본조)의 불교관계 설화를 모으고자 한 것이 그 근본의  의도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처럼 불교와 기타 외래문물의 유입원으로서 선망과 경쟁의 시선을 보냈던 한반도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9세기 이후에는 그를 대신하는 중국, 그리고 그 너머의 인도와도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하는 의식으로부터, 일본인의 자국 인식은 강건해져 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이윽고 중세에 들어가면 무엇보다도 일본국 최고라고 하는 우월감으로 바뀌어 버린다. 

폐쇄적인 국제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이른바 신국 사상(神国思想)의 성장이다. 기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1293-1354)는 그의 저서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1339년 저술, 현존 최고본은 1438년 시라야마본)의 머리말을 통해


 “대일본(大日本)은 신국(神国)이다. 천조(天祖)로부터 시작되어 기틀을 열고, 일신(日神)이 오랫동안 통(統)을 전하셨다. 우리나라만이 이런 일이 있는 것이며, 다른 왕조(異朝)에는 이런 일이 없다.……”라고 선언하였다.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친 몽골의 일본 원정이 때마침 불어닥친 폭풍우로 인해 실패로 끝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외세 침입을 경험한 일본은 두려움 속에 나라의 문을 닫고, 자신들만의 아성 속에 들어 앉았다. 이 사건은 후에 20세기가 되어  ‘신국(神國)’ 사관에 의해 재부각 된다. 2차 세계대전 때 전세가 불리해지자, ‘가미가제(神風)’ 특공대라는 것을 만들어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1910년에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어 아이들의 머리 속에까지 심어 주었다. 일본의 지식인 가운데에는 ‘신국 일본’을 내걸며 일본을 특별난 나라로 주장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급기야는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신의 나라"라고 공언하는 수상(2000년 국회의원간담회에서 당시의 일본수상 모리 요시로오)까지 등장한다.     


요즘은 어떠한가. 일본의 유튜브에는 간혹 


“일본은 세계 최고로 오래된 나라이다. BC660(전설상의 제1대 진무(神武)천황 즉위년)+2019년 역사의 최장수 나라이다.”


이런 주장이 왕왕 눈에 띈다.  

      

자국 의식이라는 것은 타국이 존재함으로써, 그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맹목적인 자국 우월 의식은  위기 의식 속에서 혹은 외부와 유리된 상태 속에서 배양된 '그들만의' 폐쇄적 국가관이었다.


일본 속의 자국의식을 들여다 보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성숙한 자국 의식이란 과연 무엇일까? 

타국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가치로운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까 고민하며, 이에 어울리는 자국의 역량을 키워갈때  피어나는 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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