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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Jun 07. 2020

'귀화'는 언제? 왜?

한반도인의 일본 귀화의 첫장면들

                                   

 재일교포 지인이 어느 날 식사 자리에서 조용히 말하길, 당신의 자녀들이 귀화하여 일본인 국적이 되었다고 하였다. 일본에서의 그러한 현상들에 대해서는 이전부터 들은 바가 있었지만, 정작 내 앞의 지인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지, 잠시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귀화’의 문제는 비단 지금 시대의 것만은 아니다. 오랜 옛날부터, 이른바 국가라는 것의 정체성이 법에 의해 확립되기 시작했던 이후로 지속적으로 있어 왔던 문제였다. 


귀화라는 개념은 물론 중국의 율령 법에 의해 생겨난 것이었고, 이 율령 법을 받아들인 한반도와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나 일본의 고대사에 있어서는 한반도계의 많은 이주민들이 일본땅에 들어가 살게 되었던 역사가 있었고, 이들 이주민들의 정착과 위치 부여는, 일본 고대국가 운용에 있어 중요 과제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일본 고대국가에서는 ‘귀화’에 관련해 다음과 같은 율령 법을 적용시켰다. 즉 한반도계 등의 외국인을 다음과 같은 과정에 의해 일본땅에 정착시키고자 하였다.      


①화외인(化外人, 외국인)으로서 귀화한 자에게는, 소재의 국군(國郡)이 의복과 식량을 지급하고, 사정을 자세히 적어 전령(飛驛)을 통해 조정에 보고할 것. 화외인은 관국(寬國, 부유한 지역)의 호적에 기록하여 본관을 정하고 안치할 것   

      (호령(戶令) 16조 몰락외번조(沒落外蕃條) 집해(集解))


②외번인(外蕃人, 외국인)이 투화(投化, 귀화)하면 과역 면제 10년

      (부역령(賦役令) 15 몰락외번조(沒落外蕃條)

 화외인이 투화(投化)하면 과역 면제 10년. 이후의 과역은 화하백성(華夏百姓, 內民)과 동일하다

     (부역령 10 변원국조집해(辺遠國條集解) 고기(古記))


③화외(化外, 외국)의 노비가 스스로 와서 귀화하면, 모두 해방하여 양민으로 할 것. 즉 호적에 기록하여 본관을 정할 것 

    (호령 44 화외노비조(化外奴婢條)),

 그(외국인)의 가인(家人, 사적 예속인), 노비가 해방되어 호적에 등재된 자는 과역 면제 3년

    (부역령 15 몰락외번조(沒落外蕃條))     


등이 그것이다. 

실 사례로도 "고구려, 백제의 사졸들이 본국의 난을 피해 투화하였다……종신의 과역을 면제하였다"(717년 11월 8일 태정관부(太政官符)), "백제왕 등은……과역, 잡세 등을 영구히 면제하였다"(797년 5월 28일 격(格)) 등, 다수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삼국통일 전쟁기 이후로 건너간 많은 한반도인들이, 당시 정립된 일본의 율령 법에 기초한 ‘과역 면제’의 대우를 받으며 일본땅에 정착하였던 모습을 전한다. 이와 같은 과역 면제 이외로도 정사의 기록에 의하면, 같은 모국민끼리 군(郡)이나 촌(村)을 이루며 집단적으로 정주시키기도 하고, 또한 유력자는 조정의 관위를 받으며 관직에 임명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 정착의 과정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식의 성을 받는 사성(賜姓)의 과정이 있었다.      


  “미노국(美濃國) 무시로타군(席田郡)의 대령(大領) 외정 7위상(外正七位上) 고히토(子人), 중위(中衛) 무위(無位) 고시(吾志) 등이 말하길 ‘고히토 등의 6대 조부 오루와시치(乎留和斯知)는 가라국(賀羅國)으로부터 모화 내조(慕化來朝)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풍속에 익숙하지 않았으므로 성자(姓字)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바라건대 국호(國號)에 따라 성자(姓字)를 사여 받기를 원합니다.’고 하였다. 가라노 미야츠코(賀羅造)라는 성(姓)을 사여하였다.”(<속일본기>758년 10월 정묘조)     


다시 말해서 6대 조부 시절에 가라국으로부터 이주해 와 살았던 집안의 자손들―고히토, 고시 등은 이제까지는 모국 가라국인으로서 일본의 무시로타군(席田郡)의 대령(大領)과 같은 지방 관리로 또는 중위부(中衛府)와 같은 조정의 관리로 일하며 살고 있었다. 6대 조부가 어느 시기의 사람인가 확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백여 년 이상의 세월을 거쳐 가라국 집안의 사람으로서 이렇게 일본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년의 757년 4월에 ‘고구려, 백제, 신라인 등, 오래전에 성화(聖化)를 사모하여 와서 우리 풍속에 익숙해져 성(姓)을 받고자 희망하면 모두 허락하도록 ……’하는 일본 조정의 조치가 내려진 이후, 한반도계의 많은 사람들이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모국의 성을 일본식의 성으로 바꿀 것을 희망하거나, 그렇게 일본식의 성을 받게 되었다는 기록이 정사 속에 다수 등장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시점에서 이러한 사성(賜姓), 개사성(改賜姓)의 과정을 거쳐 정식으로 일본인으로 귀화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적어도 백여 년 이상의 세월 동안 출신국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던 한반도계의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이 시점에서 일본식의 사성을 희망하여 일본인으로 전향하여 갔는가에 대해서는 나름 학계의 설명이 분분하다. 예컨대 사성 수여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천황이, 도래인들을 ‘천황(天皇)의 민(民)’‘왕민(王民)’으로 확정해 가려고 했던, 즉 왕권 강화를 의도로 한 조치로 해석되기도 한다. 또 당시 도래인들에 대한 차별이 존재하였으므로 이를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이민족 지배’의 논리,  ‘차별’의 문제로서 다루어지기도 한다.        


일본땅으로 이주해 온 '도래인'들이 '귀화'라는 법적 과정을 걸쳐 '귀화인' 즉, 정식 일본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귀화’의 논리는 적어도 두 차원에서 이해해 보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는 열도 내외의, 그 질서의 외곽에 놓여 있었던 사람들을 내부 구조로 편입하는 과정에서 포섭 혹은 배제하려고 했던 면. 또 하나는 왕권의 소재를 정당화시키면서, ‘王(텐노)의 民’이 된다고 하는 특수한 의미를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쓰였던 면 등이 그것이다(박이순 <일본 고대국가의 왕권과 외교>).     


 아무튼 ‘귀화’라는 개념은 이렇듯 국가가 이데올로기적 목적성을 가지고 역사 속에서 창출해 낸 일종의 가상 관념, 제도임에 틀림없다. 그것이 아직까지도 유효히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를 위해 숙고해 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그나저나 그 재일교포 지인의 자녀들과 앞으로 만나게 될 때도, 부디 여전히 우리 사이에 그 어떤 특별난 거리감을 느끼지 않게 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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