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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Jun 05. 2020

일본인은 왜 배타적 대외 의식을 가지게 되었는가

    

흔히 일본인들은 외래문물에 대단히 개방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나 공적 교류가 활발히 추구되었던 고대나 근현대 시기만 보더라도 그러한 면모가 확연히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외래문물은 좋아할지언정, 외부인 그 자체에 대한 인식면에서는 그다지 가슴이 열려 있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일본 역사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적극적인 문물 수용의 또 다른 면에서는 대단히 경계적이고 방어적인 의식을 키워온 것이 확인된다.

       

9세기 후반 죠관(貞観)연간 이후의 일본 정사 속에는 신라 ‘적병(敵兵)’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빈번하다. 예컨대 다음과 같다.      


  “옆 나라 군사가 와서 엿봄이 있을 것이다”(貞観8年(866) 4月辛夘, 동11年(869) 12月辛亥)

  “신라 적병이 항상 틈을 엿볼 것이다”(동8년11月戊午, 동11年(869) 12月丁亥)     


 조정의 공식 관사 온묘료(陰陽寮)의 불길한 예언들이 사료에 넘쳐난다. 일본 조정 또한 신라에 대한 노골적인 경계의식을 보인다.     


 “신라인은 오랫동안 흉독(兇毒)을 고치지 않고 의심스러운 것은 또 떠 내려온 척하고 틈을 엿보려는 술책인 듯하다”(동15年(873) 12月癸丑), 

“천황이 칙명을 내리길, 신라국 사람이 화심(禍心)을 품고서 몰래 우리나라를 엿보고, 비록 말로는 풍파 때문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그 독칩(毒蟄)이 의심스럽다. 모름지기 그 간특(奸慝)을 응징해야 한다”(仁和元年(885) 6月癸酉)     


이런 식이다. 그리고 이런 시선은 비단 신라인에 대해서만이 아니었다. 수도에서 해역병(咳逆病)이 발발하자 


“사람들이 말하길, 발해객이 와서 이토 독기(異土毒氣)로 인해 그런가 보다”하였다. 


발해 사절에 대해서도 ‘이토(異土)의 독기’를 가져오는 존재로 인식한다. 그리하여 이 같은 기사들에 대해 일본의 학자들은, 당시 일본 조정이 한반도에 대해 극도의 경계의식, 배타적인 대외 의식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곤 한다.     


이러한 시선에 관련해서 조금 달리 생각해 볼 점이 있다. 그 경계의식은 신라인이나 발해인 혹은 신라, 발해국 등과의 직접적인 마찰이 그 원인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신라, 발해인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는 정사(正史) 혹은 일본 조정이지만, 이는 사실상 당시 일본 국내에 역병과 기근과 같은 절박한 재해적 상황이 그 배경에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즉  ‘신라 적’에 대한 경계의식과 ‘역병’에 대한 우려는 둘이 아니고 하나의 방책으로 존재하였다고 보여진다(貞観11年(869) 12月丁酉, 元慶8年(884) 9月丙戌, 동8年10月己丑 등). 


“온묘료(陰陽寮)가 점복하여 이르길, 귀기 어령(鬼気御霊)이 분노하여 저주를 내린다. 그 지역(安房國)은 역려(疫癘)의 환(患)을 조심할 것. 또 그 지역의 동남에 병적의 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경계를 엄히 하도록.”(仁和2年(886) 8月庚戌) 등과 같이, 역병과 같은 재해적 상황에 대한 우려 속에서 경계적 폐쇄적 대외관이 굳어져 간 것으로 보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원인으로 하루아침에 수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쓰러지게 되는 상황이 반복되자, 당시 일본인들은 이를 밖에서 온 것으로 간주하였다 . 즉 그들이 생각한 역신(疫神)이란 기본적으로 외래 신이었다(山本幸司 <天皇と祝祭>). <일본서기>등에 등장하는 가라카미(韓神;漢神)도 역병과 관련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李成市 <古代朝鮮の殺牛祭祀と国家形成>), 기온 샤(祇園社)의 제신(祭神)인 역신(疫神) 우즈 텐노(牛頭天王)도 한반도로부터의 외래 신으로 알려져 있다. 애초에 불교의 불신(佛神) 또한 역병을 일으키는 외래 신으로 이해되었던 것(<일본서기>552년(欽明13) 10월 - 585(敏達14)년 6월 기사)과 맥을 같이 한다.

     

일본인이 형성한 대외 인식, 외래 존재에 대한 인식 속에는, 그들이 본래 지니고 있었던 환경 조건, 즉 역병과 같이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가항력의 존재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배타심, 대항하기 어려운 공포심 등이 그 근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민족 신앙 가운데 특히 서북쪽을 두려워하는 신앙(西北隅 신앙)이 발달하였던 것도(平川南 <今に生きる地域社会>), 한반도에 대한 두려움이 그 기저의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는 무엇보다도 경계 밖이 ‘역병’의 근원처로서 인식된, 즉 역병에 대한 두려움과 관련된 신앙이었다고 볼 수 있다. 

貞観14(872)∼19(877)년경 “무츠 국(陸奥国)보다 동쪽, 고지마 열도(五島列島)보다 서쪽, 도사 국(土佐国)보다 남쪽, 사도 국(佐渡国)보다 북쪽은 게가레(穢)의 역귀(疫鬼)의 거주지”( <죠관기시키(貞観儀式)>쓰이나(追儺)의식)라고 하여 ‘경계(境界)’밖은 ‘더러운 역귀의 땅’으로 규정된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에 관련해 신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심화로 풀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일본 국내의 ‘역귀’ 발발이라는 상황을 빼놓고 이해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역병과 같은 치명적인 재해가 빈번하였던 만큼, 일본인들의 심성 속에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의식이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고, 그러한 마음이 이렇듯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대외관을 양성시킨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기할 것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한편으로는 ‘신국(神国) 일본’ 의식도 함께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우리 일본 조는 이른바 신명(神明)의 나라이다. 신명이 보호하시면 어찌 병구(兵寇)가 가깝게 올 수 있을까”(貞観2(840)년의 宣命 )      


    10세기에는 ‘이국(異国)’의식과 더불어 일본을 ‘본조(本朝)’라 칭하는 의식이 성립했다는 지적도  있으나(榎本淳一<蕃国から異国へ>, 森公章<古代日本の対外認識と通交>), 배타적인 대외 의식과 자국 특별시의 자국 지상관(至上觀)의 형성은 결코 별도의 현상이 아니었다. 일본이 역사상 이 같은 자타 국 의식을 형성했던 배경에는, 그들이 놓여 있던, 역병과 같이 두렵고 불가해(不可解)한 재해적 환경이 있었음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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