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에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람들은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나, 혹시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삼국사기>에는 주로 ‘일본(日本)’이라는 표현보다도 ‘왜(倭)’ ‘왜병(倭兵)’ 등과 같은 표현이 더 많이 눈에 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11세기)가 기술된 시점에는 이미 엄연한 ‘일본’이라는 국호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는 물론 김부식의 역사관, 또는 고려시대의 시대관에 의해 선택된 바가 크다.
‘왜(倭)’에 대해서는, ‘왜소(矮小)하다’와 같이 상대에 대한 비칭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국 사학계의 해석 또한 이러한 사료적 견해와 유사하다.
고대 시절에 일본은 한반도의 나라들(신라, 고구려, 백제, 통일신라, 발해 등)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 이에 대해 말하자니 우선 머리가 복잡해진다.
먼저 일본 학계의 대표 명분론들이 존재한다. 1950년대 이래의 이시모다 쇼(石母田正)의 ‘동이(東夷)의 소제국론(少帝國論)’, ‘소제국’ 일본의 입장에서 본 한반도 ‘번국(蕃國, 즉 하위국)’론이 있다. 이는 니지지마 사다오(西嶋定生)의 책봉 체제론과 더불어 일본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이러한 고대 제국주의론적 담론은 사실상 아직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물론 80년대 후반 이후 이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동아시아 각 나라의 주체성을 말하는 의견(기토 기요 아키라(鬼頭清明))도 있었다.
또 “일본 고대는 근대에 발견된 역사이며, 견당사(遣唐使) 편중의 고대 일본 대외사는 근대 일본의 구미와의 접촉에서 의해 표징된 역사”라는 지적(李成市,1997)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를 비롯하여 정사나 율령 해석집 등에 한반도 나라를 ‘번국(蕃國)’이라고 기록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삼아 , 일본학계의 끊임없는 논쟁거리가 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에 대해 고대사 연구자로서 사료 검토하여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중국적 한자 개념을 들여온 일본은 이웃나라를 칭하는 여타의 단어를 만들어 내지 못하였다. 국가 간의 관계를 상하의 수직적 관계로 칭하던 중국이 이웃나라를 하대하며 불렀던 ‘번국’이라는 용어를 일본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 ‘번국’에 대해, ‘도나리의 쿠니(隣國)’ 즉 이웃나라라는 인식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다시 말해 중국식 한자 사료상의 용어와 당시의 실제 인식 사이를 별도의 차원에서 고찰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근데 문제는, 예컨대 <속일본기> 등의 기록상, 신라에 대한 일본 조정의 인식이 이게 별로, 그다지 좋지는 않다는 점이다. 다음과 같은 사례들이 그러하다.
“신라국이 갑자기 나라 이름을 바꿔서 왕성국(王城國)이라 불렀다. 따라서 그 사절을 돌려보냈다(735년)”,
“신라 사절이 조(調, 조공물)를 토모(土毛, 지방 특산물)라 부르고, 문서에 직접 물건 수를 기입하였다. 이는 크게 상례(常禮)를 어긴 것이니……돌려보내야겠다”(743),
“신라는 이미 말에 진실이 없고 예의에 어긋났다……왕자조차 말에 신용이 없으니 하물며 가벼운 사절은 이루 말할 것도 없다……(신라) 사절이 경미하니 손님으로 대하기에 부족하다. 이에 돌려보내니, 너의 나라에 전하여 제대로 대응할 만한 사람, 성심 되고 거짓 없는 예의를 갖추고, 본래의 공물을 준비하고, 분명한 말을 하는 사람으로 보내도록 하라”(760) 등과 같은 상황의 연속이었다.
이에 대응하는 신라 사절의 모습 또한, 일본과의 관계 맺기에 그다지 절실하지도, 공손하지도 않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속일본기> 참고).
“신라 사절 김정권이 말하길 ‘그때 나는 외관(外官)이었다. 또 신분이 낮아 잘 모른다’”(760),
“신라 사절 김체신이 말하길 ‘국왕의 말씀을 받들어 단지 조(調)를 받치러 왔을 뿐이다. 그 밖의 일에 대해 감히 알 바 아니다’”(753),
“본인(김삼현)은 조공사가 아니다..... 그 밖의 것은 잘 모른다”(774), 이런 식이다.
신라는 이와 같은 자세로, 일본 조정이 끊임없이 요구하던 정식 외교 문서 =국서(國書, 국왕의 문서)를 단 한 번도 지참하지 않았다. 연이어 가서는 일본 조정에 대해 조공을 말하는 듯하였지만, 사실은 장사, 무역을 주로 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신라 사절들에 대해 일본 조정은 이를 사절의 예의로 대우하지 않고 국경지역인 대재부(大宰府) 등에서 그대로 돌려보내는 ‘방황(放還)’의 조치를 내리는 등, 강변이 대응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일본 귀족들을 비롯한 일본 조정의 ‘신라 물건’에 대한 욕구는, 명분보다도 큰 것이었다. 급기야 일본 조정은 대재부의 고급 면을 관리들에게 지급하면서까지 신라 물건을 사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라에 대한 경계의식은 사실상 날로 깊어져 갔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인은 장사를 핑계 대고 일본의 정세를 엿보고 있습니다. 일절 입국시키지 못하도록 하길 바랍니다”라는 대재부로부터의 보고서도 조정에 올라갔다(842). 그러나 이에 대해 조정은
“신라 입국을 일절 금지하는 것은 덕치(德治)가 아니다. 우선 입국은 인정하도록. 단지 이주는 인정하지 말고 대재부로부터 귀국시킨다. 만약 무역을 희망하는 자가 있다면 교환시키고 돌려보낸다”로 지시하고 만다(<유취삼대격>842년 태정관부).
이 부분에 대해, 쓰시마에서 돌려보내도 되는데도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무역 이외의 이유로는 생각되지 않는다”라며, ‘교토에 사는 귀족들의 위기의식의 결여’를 꼬집은 일본 학자도 있다.
아무튼 고대의 한일 간―정확히는 일본, 통일신라 간에 있어서 보이는 서로의 인식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일본 외교의 정치적 관심은 늘 조선 제국(朝鮮諸国)에 있으며, 그보다도 우위에 있고 싶다는 인식이 근본에 있었다”(이시이 마사토시石井正敏)는 평가에 우선 동의한다.
그리고 그 신라인에 대한 인식은 경계(警戒)와 불신의 불안감으로 표현된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라 사절로부터 입수되는 선진의 문물에 대한 실질적 욕구가 신라와의 관계를 지속해 나가게 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삼국사기>를 참고로 해서 보나, 또 일본의 정사를 보나, 신라의 일본에 대한 태도에는 일본에 대한 존중감이나 겸손은 잘 보이지 않는다. ‘상매(商賣)’의 시장 정도로 생각한 느낌이 크다.
일본 열도에서는 그 고대의 ‘일본’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고, 한반도에서는 그 통일신라가 무너지고, 고려, 조선 등을 걸쳐 지금의 대한민국이 되었다. 사료를 살펴보자면 중세, 근세, 근대 등에 이르러서도 한일 간의 인식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다는 것이 거듭 확인될 뿐이다.
왜 그럴까? 이렇듯 오랜 세월 동안이나 양국 간에 서로를 바라보는 인식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점에 대해. 한일 양국이 서로 처음부터, 즉 정사의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한 시점에서부터 보이는, 상호 간의 불신과 불인정의 역사를 말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계기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어쨌든 두 나라는 서로에 대해 안 좋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 기억을 두뇌와 사료 속에 집어놓고 대를 이어 이를 꼽씹어가며 이데올로기적으로 재생산해 왔다는 것이다. 서로 간에 인식을 바꾸려고 노력하지도 않았고, 바꾸지도 않았다. 중간중간의 '왜구' 문제나 '왜란' 등의 사연이 이러한 불신의 골을 더욱더 깊게 만들었을 뿐이다.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불신의 첫 단추부터 누구의 잘못인가부터 따지고 들어가는 일은 굉장히 복잡한 일인 듯싶고, 또 그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그다지 현명한 태도는 아닌 것 같다. 어떻게 하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한일 간에 놓인 문제-서로에 대한 인식의 문제를 풀 수 있을까? 먼저 이 점을 해결해야 할 것 같다.
이를 위해 우리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명제에 서 보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풀기 위해’ 서로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관계란 어느 한쪽의 문제가 아니고, 쌍방이 같이 노력할 때 풀어갈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대의의, 근원적인 마음자세에 서보는 것은 어떨까.
즉 먼저 상대를 이해해보려는 태도, 큰 마음을 가져보는 것이다.
왜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지, 그런 태도를 보이는지 알아보려는 자세이다.
서로의 역사가 무엇을 남겨왔는지, 그래서 지금 서로가 각기 어떻게 다른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서로에 대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등등, 있는 그대로를 파악하고 이해해보려는 노력이다.
우리 시대에 있어 상대를 인정해 줄 수 있는 포용력은,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국제적 감각과 리드력이며, 세련된 태도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퓰리처상 수상작 <총, 균, 쇠> 안의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논문을 인용해 보고자 한다. ‘첨단 과학의 지식을 도입한 권위 있는 서구의 학자’라는 평가를 받는 재러드 다이아몬드 씨의 의견이다. 씨는 고대 일본어와 고구려어와 유사함을 지적하기도 하고, 청동기, 철기문명의 야요이 시절(BC3C-3C) 이주한 한반도인이 지금의 일본인에 연결됨을 이야기하였다.
“양국의 지난 역사는 서로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게 했다. 아랍인과 유대인의 경우처럼 한국인과 일본인은 같은 피를 나누었으면서도 오랜 시간 서로에 대한 적의를 키워왔다. 하지만 동아시아와 중동에서의 이러한 반목은 함께 해결해 나갈 수 있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수긍하기 힘들겠지만, 그들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양국이 고대에 쌓았던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654쪽)
*그림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 주변의 해저(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육지가 분리된 것은 약1만년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