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기5)
일본에서 처음 대학원 수업을 들은 것은 대학원 외국인 연구생으로서의 자격이었다(1990년).
지도교수였던 사사야마(笹山) 교수의 학부생 위주의 일본사 강의, 그리고 대학원 세미나 수업 등에 참가해 보았다. 교수님은 본인의 저서를 중심으로 강의를 하셨는데, 학생들하고 눈을 맞추는 일은 거의 없었다.
당시 일본 황실 자녀의 역사교육을 맡고 있던 사사야마 교수님에 대해, 이를 지탄하는 문구가 교내 벽보의 어딘가에 붙어있었던 기억은 나지만, 교수님은 사적인 언동이 지극히 적고, 늘 조용히 학문을 하는 분이었다.
그 성실한 업적으로 인해, 같은 학문의 길에 입문한 대학원의 제자들은 깍듯이 교수님을 대했다.
제자 된 자로서 지도교수님과 충돌하는 의견을 공적으로 제기하지 않는 오래된 도제(徒弟) 제도의 유풍이 당시의 동경대 연구실 분위기 속에 살아있었다.
대학원 제미(ぜみ, 세미나)에 들어가면 그 분위기는 제법 엄중했다.
교수님 자리를 중심으로 그 옆에는 반드시 최고참의 박사과정 선배들이 양옆 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쭉 학년 순으로 후배들이 앉는다. 외국인 연구생이었던 시절에 나는 물론 맨 끝 자석, 뒷문 옆자리 신세였다.
아무도 그러라고 명령하지도, 가르쳐 주지도 않았지만, 어길 수 없는 질서 속에서 암묵적으로 결정된 자리였던 셈이다.
어느 해인가 중국인 유학생 연구생 하나가 들어왔다. 그 친구가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중간 자리 어딘가 덜러덩 앉았다. 내가 다가가서 “끝으로 가”라고 가르쳐 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나는 못 깨지만, 누군가가 그 분위기를 바꿔 줄 필요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그 중국인 친구는 수업에 열심히 나오지 못하여, 역시 그 분위기는 내가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처음 일본에 갔을 때 6개월간은 수업 중간에 오가는 대화의 언어가 들리지 않아서 고생을 했다.
가기 전에 일본의 중학교 역사책을 달달 외우기는 했지만, 막상 수업에 참가하니 역사적 고유 명사, 인명, 지명, 고어(古語)까지 해서, 이런 것들이 귀에 들어오지가 않았다.
게다가 수업내용은 양로 율령(養老律令)의 해석집 <료노슈게(令集解)>에 대해 해제를 하는 수업이었고, 기초지식이 없는 데다가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한쪽 후미진 자리에 앉아서 무슨 소리들 하는지 어림짐작만 할 뿐이고, “한국에서는 어떠냐”라고 간혹 오는 질문에 가슴 철렁하며 긴장감에 졸아 있던 시절이었다. 모두가 웃는데 나는 혼자 멀뚱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속상하고 자존심이 상했는지,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 4층 화장실 가서 혼자 눈물을 훔치기도 하였다.
중앙 도서관 1층
당시 동경대를 중심으로 한 학계에서는 일본 고대국가의 위상에 대한 문제와 관련하여 율령(律令) 연구가 한창이었다.
<료노슈게(令集解)>의 법 구절 하나하나에 대해 각 1인씩 발표자가 정해지고, 그 각 1인당의 발표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이어졌다. 중국의 산일(散逸)된 본래의 법 규정과의 비교분석에서부터, 한자 고사전에 의한 의미 분석, 고대 법률학자들의 해석에 대한 분석, 정사 속의 실 사례 조사 등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고 치밀한 고증연구였다. 각 개인의 발표문들이 모아져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오기도 하고, 국사학과(일본 사학과) 연구실 창고에 켠켠히 매해의 연구물들이 쌓아져 갔다.
규슈대학에서 임나일본부 연구로 학위를 하신 어느 한국인 교수님께서 “일본 연구자의 연구물들의 성이 너무 높아서, 그 내용이 설령 잘못된 것이라고 해도 어느 개인의 힘으로는 부수려고 해도 도저히 부술 수가 없다”며 탄식하시던 생각이 났다.
그 꼼꼼하고 방대한 연구물들은 그대로 그들이 말하고 싶어 하는 주장을 밑받침해주는 힘이 되어, ‘진실화’ 되어버리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이 아무리 위대한 주장을 한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의 힘이 집약된 주장 앞에는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이 그렇듯 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모아 일관된 결과물을 낼 수 있고, 그를 주장할 수 있는 힘이 있는 나라라면, 그 집약된 주장이 과연 어떤 것인지, 그리고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가 바로, 장차 일본이, 일본 사학계가 돌아보고 고민해 나가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