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쟈크모노가타리슈(금석물어집)>란 무엇인가?
보통 고대(古代)의 시기에는 사료가 적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일본의 경우는 좀 안 그런 것 같다.
일본 고대사를 공부하면서 제일 처음으로 읽게 되는 사료는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의 6국사와 같은 정사(正史)류이다. 물론 정치사회사 중심의 기록이며, 당시의 조정 지식인들에 의해 취사선택된, 일명 ‘나라의 역사’이다. 그러나 일본 고대에는 그러한 정사 이외로도 귀족들에 의해 남겨진 다양한 시가, 일기, 문집류가 제법 풍부하게 존재한다.
일본 사회, 일본 사람들의 삶과 정신세계를 뿌리 깊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들로 꼽아보고 싶은 것에는 우선, 헤이안 시대(794년 이후〜중세 가마쿠라 막부 설립 1185년 이전까지)에 쓰인 <일본영이기(日本霊異記)>,<일본왕생극락기(日本往生極楽記)>,<대일본국법화경험기(大日本国法華經験記)>,<금석물어집(곤쟈크모노카타리슈;今昔物語集)> 등과 같은 설화집들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내가 일본인을 보편적으로 이해하는데 있어 재미있게 애독해 온 책은, 일본 최대의 설화집인 <곤쟈크모노카타리슈>가 아닐까 한다(신일본고전문학대계본, 岩波書店,1994 참고).
이 책은 작자 미상이며, 11세기 이후 12세기 전반의 성립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모두 그 책 제목대로 ‘今昔(이마와 무카시)’, 즉 ‘지금으로 말하자면 옛날이지만’으로 시작한다. 총 31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결락된 부분도 있으나 1040화 정도가 현존하다.
천축(天竺, 인도), 진단(震旦, 중국), 본조(本朝, 일본)의 3파트로 나누어, 이 3 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불교 담, 세속 담 등의 다양한 일화들을 싣고 있다. 이 편목의 구성을 통해 당시 이미 일본의 관심 세계가 이들 3 나라 중심이었다는 일본 학계의 지적이 있다. 즉 이 시대에 이미 한반도는 일본의 관심 밖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아무튼 이렇듯 풍부하게 자료를 모아 편집할 수 있었다는 것에 우선 그 의미를 부여해 볼 수 있다.
문학사에서 뿐이 아니라, 불교학, 역사학, 사회학, 국어학 등의 각종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서도 그 가치성이 높게 평가된다.
각 일화의 끝부분에는 책의 편자가 덧붙인 마무리 멘트랄까, 전해주는 메시지가 담겨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훈계하고, 인도해 나가려고 했던 목적성도 느껴진다.
오랜 시간 정사만 읽다가 이런 설화집을 읽으면 살아있는 사람의 체취가 느껴져 매우 즐거워진다.
특히 본조(本朝, 일본)편 가운데 제26권 27권 28권 29권 30권 등은 일본에 내려오는 각종의 세속적 이야기들이 ‘숙보(宿報)’‘영귀(靈鬼)’‘세속(世俗)’‘악행(惡行)’‘잡사(雜事;연애담)’ 등의 이름 아래 정리되어 전해져 내려온다. 이른바 일본인들이 중요시 생각했던 정신세계의 키워드들인 셈이다.
현존했던 역사적 인물, 정사에 그 이름이 등장하는 실존 인물 등도 제법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대부분 시대, 장소, 인물 명 등이 기록되어 있어, 굉장히 실화적인 색채를 띤다. 무엇보다도 하나의 일화가 전개되는 가운데에 당시 사람들의 사고방식, 일처리 방식, 인간관계, 사회적 관계를 맺는 등에서의 주요 관념, 의식 등이 읽혀 대단히 흥미롭다.
16세기 무로마치 시대에 많이 알려지기 시작하고, 에도 시대에는 목각 활자본으로 출판되어 세간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일본 근대문학의 대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 등이 이 <곤쟈크모노가타리슈>를 참고로 하여 탄생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곤쟈크의 세계가 지금도 일본에서 각종의 애니메이션, 영화, 만화, 소설, 방송물 등의 소재로 재 부각되고 있고, 가장 일본적 심성을 표현하는 주요 테마들과 연결되어 재생산되고 있다.
고대로부터의 과거가 현재와 단절되지 않고, 일본인의 일상과 정신세계의 밑바닥 속에서 은은히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한번도 (적어도 7세기 후반 이후 - 지금까지) 그 국명을 변치 않고 유지해 왔듯이, 앞시대의 정서를 부인하는 일 없이, 일상적으로 연면히 이어 왔다는 점이 확인되는 부분이기도 한다.
왕조가 바뀌면서 이념이나 종교적 선택이 달라져 왔던 역사와는 다른, 긴 호흡의 감성을 느끼게 된다.
곤쟈크가 나온 뒤 천년의 세월이 흘렸지만, 현대의 일본인들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인간의 정신세계란 변하지 않은 것인지! ―간간히 확인되는 변모의 흔적보다도 더 강렬하게― 그 점을 잘 확인시켜준다.
일본인들이 그들 자신의 고전으로 남기고 보전하고 읽어오며 그들의 것으로 견지해 온 사유의 세상을 맛볼 수 있는 텍스트가, 지금에 남겨져 있고,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