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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Nov 13. 2020

일본은 왜 요괴 담의 나라가 되었는지

         

 유령이나 귀신을 포함한 괴이하고, 불가사이한 이야기, 무서운 이야기 등에 대해 사람들은 흥미를 느끼는 것 같다. ‘인간 정서 속에 공포를 즐기려는 욕구’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임재해 <민족 설화의 논리와 의식>). 


특히나 일본에서는 ‘요괴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일찌기 메이지(1868-1912) 후반에 등장하였다.

일본의 한 '요괴학자'는, 요괴학의 의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요괴문화의 고찰을 통해서, 인간 정신의 역사와 마음 상태를 관찰하는 학문.....요괴를 연구하는 것은 요괴를 만들어 낸 인간을 연구하는 것......요괴학은 '요괴문화학'이며, 요괴를 통해 인간 이해를 깊게 하는  '인간학'......"(小松和彦<妖怪学新考察>)


일본에서는 고전문학에 등장하는 요괴 담이 소재가 되어 현대에서도 갖가지 문학작품이나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산업 등의 여러 콘텐츠에 활용되고 있고, 그 영향이 한국에까지 미치고 있는 듯하다. 



일본 역사 속에서 요괴 담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9세기 헤이안 시대부터이다. 

이 시기의 일본은 고대국가를 출범시킨 이후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하여 정쟁이 반복되었고, 조정의 인물들이 무고한 죽음을 당하는 일들이 빈번하였다. 

또한편의 문제는 거듭되는 자연재해와 역병이었다. 사람들이 병을 앓거나 죽어 나가는 일들이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러자 정치적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이들의 사령(死靈)이 ‘저주’와 ‘보복’을 내려 병이 돌고 사람이 죽는다고 하는 관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간무 천황(737-806) 시절, 황태자가 이름 모를 병을 앓자 이는 억울하게 죽은 사와라 신노(早良親王, 간무 천황의 동생)의 ‘타타리(저주)’에 의한 것이라고 인식되었다(동궁(東宮, 후계자)이었으나, 후지와라 다네쓰구 암살 사건에 연좌되어 귀양 도중 단식으로 사망). 이에 천황가의 모든 조령(祖靈)들까지도 ‘저주’를 내리는 존재로 인식되게 되었다. 그러더니 급기야


 “모노노케가 있을 때마다, ‘선령(先靈)의 저주’라고 하는 세간의 작태가 극심해지기에 이르렀다.”(844년 8 월조).      


모노노케(物怪, 怪異, 邪気)의 ‘모노’란 실태가 없는 신(神)・영(霊)・귀(鬼)・정(精) 등의 영적 존재를 가리킨다. 즉 모노노케란 ‘신(또는 영, 귀)에 의한 전조, 징후’란 뜻이다(繁田信一, <呪いの都 平安京>. 

 

역병과 같은 재해도 신이나 사령(死霊)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듯이,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각종의 괴이― ‘모노노케’ 현상도 신이나 사령에 의한 ‘저주’의 징후로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러한 판단과 인식을 뿌리내리는데 주된 역할을 했던 것은, 모두 조정의 공식 기관 진기칸(神祇官)이나 온묘료(陰陽寮;음양, 천문, 역, 누각 관장)의 점복(卜占)이었다. 


온갖 역병, 가뭄, 화재 등의 재해와, 병, 죽음 등의 상황을 죽은 자에 의한 저주, 복수 등으로 생각하는 인식이 강고히 뿌리내리면서, 그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의 관념이 일본인의 정신세계의 기저를 물들여간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길, 귀물(鬼物)이 형태를 바꾸어 이 같은 도살을 행했나 보다”와 같은 “궁중 및 수도에 근거 없는 요어(妖語)들이 수도 없어 다 자세히 싣지도 못하는”(887년 8 월조) 상황이 전개되고, 


정사(正史)에까지 요괴 담이 등장하게 된다. 게다가 온묘료(陰陽寮)가 

“귀기 어령(鬼気御霊)이 분노하여 저주를 내려 역병의 우환과 나라의 동남에 적병의 난이 있을 것이다.”(886년 8 월조)라고 예언하는 등, 


역병이 ‘오니(鬼)의 저주’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이 조정에 의해 공식 선언되기까지 이르렀다.

      

오니(鬼) 사상은 원래 중국 주대(周代)의 궁정 행사 추나(追儺)에서 가면을 착용한 방상씨(方相氏)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헤이안 시대 초기에 일본의 궁정 행사로 받아들여졌다. 10세기에는 역병이 오니(鬼)에 의한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화되어, 역병의 발발과 함께 오니 사상이 일본에 횡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불어 온갖 ‘모노노케’ 현상도 각종 요괴, 오니에 의한 것으로 연결되어 일본은 넘쳐나는 요괴 담의 나라가 되었다.     

 

이렇듯 일본 역사에서 살펴본 요괴 담의 발생은, 험난했던 환경조건 속에서 빈번한 병과 죽음 등의 상황과 맞다 뜨리면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웠던 두려움과 공포의 관념의 표상화였다. 


길가에 버려진 시체들 . 시가현(滋賀県)오츠시(大津市)의 쇼즈라이고 사(聖衆来迎寺) 소장의 육도회(六道絵) 가운데  인도부정상도(人道不浄相図). 가마쿠라(鎌倉) 초기 작.



이후에도 일본의 역사에서는 생명을 위협당하는 자연재해나 정치적 유혈 사태는 반복되었고, 그 결과 에도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요괴 담이 남겨졌다. 요괴가 그림으로 시각화 되기도 하였다. 


갓파(河童; 일본의 수많은 요괴 가운데 하나로, 유명함;一勇齋国芳画, 曹源寺 소장) 



메이지 시대에는 불교철학자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가  <요괴학 강의>로 요괴 설화를 집대성 했고, 민속학자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国男)가 <요괴담의(妖怪談義)>(1956년)을 간행하는 등, 많은 요괴 전문가가 탄생했다.


환경조건이 정비된 현대에 이르러서는 과거 기록 속의 요괴들을 모티브 삼아 일본은 활발한 문화산업, 수익사업을 벌이고 있다. 

그 덕분에 요괴는 과거인의 정신세계뿐만 아니라 현대인의 정신세계에까지 침투해 들어왔다. 

요괴의 '귀염둥이(可愛い) '화가 이루어지는 모습도 보인다.

 

'요괴'라는 콘텐츠가 잠시 잠깐의 유희가 될 수도 있지만, 한조각의 음습한 정서를 재생산해 나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요괴가 본래의 거주지로 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마음 내부이다"(小松和彦)라는 지적처럼,


특히나 현대인이 겪는 여러가지 불안, 정신적 피로와 스트레스 등이 이러한 '요괴'문화의 지속적인 존속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닌가 싶다.

따라서 인간 마음의 불안이나 공포, 두려움 등에 대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된다면 더이상 이런 캐캐묵은 '요괴'를 꺼내 드는 일은 없지 않을까. 

사람들의 바람직한 정서를 위해서라도, 이왕이면 곱고 아름다운 소재의 콘텐츠들이 활황을 이루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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