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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Nov 06. 2020

무력을 중시해 온 나라, 일본


   “중국의 문인 계급, 인도의 바라몬 사제자 계급에 해당하는 계급은, (일본에서는) 결국 성립하지 않았다.……인간 결합 조직의 질서를 중시하는 일본인의 사유 경향이, 권력행사를 본질적 기능으로 하는 무인으로 하여금 사회의 최상자・지배자로서의 지위를 얻게 하였다.” (나카무라 하지메,<일본인의 사유방법>)     


그리고 이러한 역사가 결국 ‘힘에 의한 인간 결합 조직을 옹호하는’ 일본 사회를 낳았다는 것이다. 의미 있게 느껴지는 지적이다.      


일본의 고대 정권은 중국과 한반도를 통해 받아들인 한자와 유교 문헌을 기초 지식으로 하여 국가를 탄생시켰고, 이를 유지해 가는 데에는 문치주의적 이념들이 지향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사기>나 <일본서기>의 초창기 시절의 많은 신화적 장면들은, 그들의 왕조가 무를 통해 제패한 정권이었음을 자못 역력하게 보여준다. 즉 천황가의 전승 기록은 청동기, 철기의 무기를 소지한 자가 여타의 지역들을 정복함으로써 성립하였다는 것을 기록하며, 근원에서부터 무의 나라로 출발하였음을 이야기해 준다. 무를 숭상하는 관념이 그들의 신화 속에 만연해 있는 것이다.



<고사기><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의 판도를 넓혔다는 전설상의 영웅 야마토 타케루(ヤマトタケル);

타케루는 무(武) 또는 건(建)으로 용자(勇者)라는 뜻

 쇼와(昭和)9년 간행의 국정교과서 <심상 소학 국사(尋常小学国史;上巻)>에 실렸다(国立教育研究所付属教育図書館 소장)

 


고대국가가 지향하였던 유교적 공지 공민제의 원칙은 일찌감치 무너진다. 

743년 간전영년사재법(墾田永年私財法) 등을 통해 귀족들의 사유지 보유와 확대는 명실 공히 합법화된 시대가 열린다. 사유지 확대의 다툼 속에 농민병 고용이 일반화되고, 권력다툼의 쟁란 속에서 일본은 본격적인 무의 시대로 돌입하였다. 

인간 정신의 구원 역할을 해야 할 불교의 대사원 역시 대규모급 장원의 소유자로, 승병을 보유하며 그 무력에 의존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싸웠다. 


처럼 조정이나 사사(社寺), 중앙이나 지방의 세력 그 누구 할 것 없이 무를 통해 자신들의 생존과 번영을 탈취하는 무 숭상의 역사는 이미 고대 시절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고대국가 수도 교토의 치안 유지를 맡았던 게비이시(検非違使). 고닌(弘仁;810-824)연간 성립

 

쓰와모노(兵, 병)의 연습;쓰와모노(兵)의 일상은 전투 훈련 . <一遍聖絵>清淨光寺・歓喜光寺 소장


      츠이부시(追捕使)에 따르는 무사 2기(騎). <伴大納言絵詞>, 出光美物館 소장 

고대 후기부터 '사무라이(侍; 모시는 자)'로서 궁정, 귀족에 출사했고, 수도 쿄토에 있으면서 '살인의 달인'으로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귀족 특정세력이 정계를 이끌어 가던 고대가 멸망한 뒤, 약 12세기부터 19세기의 근대 개항에 이르는 700년간은 본격적으로 무가(武家)의 수장이 최고위의 권력에 군림하였다. 이 오랜 세월에 걸쳐 무가적 이념들이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주도하여 갔던 것이다.    


중세 이후 무가 시대의 바탕이 된 이념은, 기본적으로 고대 귀족 시대 이래의 토지관계를 근본으로 하는 실리적인 것이었다. 무력으로 권력을 수호하며 보상관계를 중시하는 사고가 형성되었다. 무가 정권의 수장인 장군과 부하인 고케닌(御家人) 사이의 관계는 충성(봉공奉公)에 대한 맹세를 담보로 하여 토지 수여(어은御恩)를 하는 경제적 관계를 그 기본으로 하였다.       


이런 가운데 고대 이후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회적 룰로 작용한 것은, 서로 갚아야 할 것을 제대로 갚아야 한다는 ‘오카에시(お返し)’의 관념이었다. 그 속에서 실리를 쫒아 움직이는 배신과 배반도 자행되었으며, 보복의 관념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또한 더불어 범죄를 일으킨 자보다는, 당하지 않도록 주의, 경계해야 된다('気をつけて')는 점에 주목하는 신중주의적 사고방식이 널리 퍼져 나가기도 하였다.


 일본은 몽골 이외의 외침을 받아본 적이 없고, 본격적인 외세의 간섭 없이 동녘 끝자락의 섬 속에서 오랫동안 그들만의 역사를 영위해 왔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지진, 풍우 등의 자연재해가 빈번하고, 고온다습한 기후, 시체 방기 풍습 등의 환경으로 역병이 만연하여 다수의 사망자가 속출하였다. 이에 더해 땅뺏기 싸움과 권력다툼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살상이 연속되었다. 


그 속에서 개인이나 사회적으로 처해진 불우한 사태를 ‘역신이나 원령에 의한 보복’으로 해석하는 그들 식의 관념이 팽배해졌다. 음적인 주술 세계도 발달하게 된다. 

이러한 음적인 의식들은, 자기가 소속한 집단 밖의 외부에 대해 ‘후신(不審;수상쩍어하는)’으로 생각하는 경계 의식, 막연하면서도 배타적인 의식으로 강고해진다. 더욱 확대되어 자국 밖의 나라를 ‘이국(異國)’으로 여기며, 외래인에 대한 부정적인 심성을 양성해 가기도 하였다.      


무 숭상, 실리성, 자기 집단 중심의 이질적 배타의식 등은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대외 팽창주의, 제국주의, 군국주의 등의 이념과 맥을 같이 하며 외부 세상에 펼쳐져 보였다. 일본이 대전(大戰)의 세계사적 불우를 빚어낸 원인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일본 역사의 초창기 시절부터 심어지고 자라나 왔던 이념들의 결과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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