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 우승상 유계>
헤이안 시대에는 귀족들이 집안의 자손들을 위해 유계서(遺誡書)를 써서 남기는 것이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가훈서의 하나에 후지와라 모로스케(藤原師輔;908ー960)의 <구조 우승상 유계(九条右丞相遺誡)>가 있다. 그가 자손들을 위해 남긴 약 1550자 정도의 글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일본 고대 귀족들의 일상이 보인다.
아침에 일어나면 속성(屬星)의 명호(名號)를 7번 외운다.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본다(흉조를 살핌).
다음으로 달력을 본다.
요지(楊枝)를 사용해 이를 닦고, 입을 씻고, 서쪽으로 향해 손을 씻는다.……
다음으로 불명(仏名)을 외우고 항시 존중하는 곳의 신사(神社)를 생각하며 빌어야 한다.……
아침 식사는 죽(밥, 堅粥). 아침저녁의 식사는 많이 너무 먹으면 안 되며, 정해진 식사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먹어서도 안된다.……
식사가 끝나면 머리를 빗는다(3일에 한번).
손발톱을 자른다(손톱은 축(丑) 일에, 발톱은 인(寅) 일).
목욕은 5일에 한번(매월 그믐의 목욕은 단명, 8일은 장수, 11일은 눈에 좋고, 18일은 도적을 만나고, 오(午) 일은 애경(愛敬)을 잃고, 해(亥) 일은 창피를 당한다).
무릇 성장하여 자못 사물의 사정을 알게 되면 아침에는 경서(經書), 사전(史傳)을 읽고, 서도(書道)를 배우고, 그 뒤에 노는 것은 괜찮다. 단지 박혁(博奕, 도박)과 응견(鷹犬;사냥)은 엄히 금한다.
임금을 위해 충절을 다하고, 부모를 위해 효경의 성의를 다하고, 형을 아비와 같이 공경하고, 동생을 자식처럼 사랑하며, 공사 대소의 일에 반드시 마음을 하나로 하고 ……
의관부터 차마(車馬)에 이르기까지 지금 있는 것을 사용하고 특별히 화려한 것을 구하지 않는다.……
가볍게 타인의 물건을 빌려서는 안 된다. 만일 어쩔 수 없이 빌렸을 때에는 일이 끝나면 바로 돌려준다.
고로(故老)나 조정 일에 달통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 현자가 행하는 것을 들으면, 거기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뜻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많이 듣고 많이 보는 것은, 과거를 알고 미래를 대비하는 일이다……
일찍이 본존(本尊; 개인이 공양 예배하는 불)을 정하여, 손을 씻고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거나 진언(真言)을 암송할 것.……믿지 않는 무리는 유달리 단명한다는 것은 앞사람들이 남긴 본보기가 있다.……
무릇 사람을 위해서는 항시 공경의 뜻을 다하고 오만한 마음을 가지면 안 된다. 사람들과의 사귐에는 마음을 써야 한다.……
좋지 않은 것을 말하게 되면 동석을 피하도록 하고,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면 입을 조심해 동조하지 않도록 한다. 가령 사람을 칭찬하는 일에도 타인에게 동조해서는 안된다. 하물며 욕을 하는 일 등은 절대 안된다.
함부로 다른 집에 가서는 안된다. 함부로 대중과 사귀어서도 안된다. 교우(交友)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옛 현인(賢人)도 주의한 바가 있다.……
큰 소리로 미친 듯이 말하는 사람과 동반해서는 안된다. 항시 바른 성인의 도를 알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된다. 또 자신의 부빈(富貧)한 점을 사람에게 말해서도 안된다. 친척, 가족에 관한 일을 경솔히 이야기해서는 안된다.
자택에 있을 때에는 도속(道俗)에 관계없이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설령 머리를 감거나 식사 중이라도 반드시 바로 손님을 만나야 한다.「속발 토포(捉髪吐哺;목욕 중에 손님이 오면 머리를 잡고 맞이하고, 식사 중에는 음식을 토해내고 서둘러 맞이하라는 뜻)」의 가르침은 옛 현인(賢人)이 중시한 바이다.
재난은 입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조심해야 한다.……
별일 아닌 것에 화를 내서는 안된다. 만일 틀린 짓을 하는 자가 있다면 그때는 야단쳐도 나중에는 용서해 주고, 끝까지 야단치거나 해서는 안된다. 마음속으로는 화가 나도 입으로 내서는 안된다. 언제나 온화한 마음으로 있고 희노(喜怒)의 마음을 드러내면 안된다.
가계의 10분의 1은 공덕을 위해 써야 한다. 죽은 뒤를 생각해서 미리 준비해두지 않으면 처자, 종복(從僕)의 불행을 초래하는 것이 된다.……단지 청빈한 사람은 그리하는 것이 어렵지만 준비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의 차이가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행동거지, 그 마음가짐에 이르기까지, 자손들에게 이리하고 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아주 꼼꼼히 주의, 주지 시키고 있다. 물론 이 같은 글에는 중국 고전으로부터의 끌어다 쓴 내용도 많다. 하지만 일본 정계의 최고위의 지식인들이 이러한 생활철학 속에 있었다는 점 또한 알 수 있게 해 준다.
이 같은 가훈서는 일찍이 8세기의 기비 마키비(吉備真備)의 가훈서 <사교유취(私敎類聚)>로부터, 9세기 말 우다천황이 양위할 당시 아들 다이고 천황에게 써준 훈계 서문 <관평어유계(寬平御遺誡)> 등, 비교적 세세한 내용이 전해 오고 있다.
이상에 대해 헤이안 귀족들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는 선례나 중시하고, 세심한 ‘작법(作法)’만을 문제 삼는 풍조 속에 젖어 살았다는 역사적 비판이 한쪽에 있다.
귀족으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귀족으로서의 관위와 경제적 특권을 누리게 되는, 탄탄한 신분의 반석 위에 존재했던 헤이안 귀족들.
절대 흔들리지 않을 안정된 신분을 확보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에게 더이상 '나라 일'은 관심 밖이었다.
귀족들의 일상은 선진 중국으로부터 배운 지식,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説)에 의해 지배되었다.
모노이미(物忌み)라는 점괘가 나오면 외출을 삼가하거나, 가타타가에(方違い)라고 하여 흉(凶) 방향을 피하기 위해 전날 미리 길(吉)방향으로 갔다가, 소기의 목적지로 행하는 등의 많은 제약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키는 것에 세심한 신경을 쓰며 살았다.
어두운 방에서도 얼굴이 보이도록, 남성도 아연이 들어간 오시로이(하얀 분)로 두텁게 얼굴을 칠하고, 눈썹은 모두 뽑아서 신분이 높을수록 이마 위 쪽에 짙게 그렸다. 눈은 가늘고, 코는 작고 둥글고, 입은 오초보 구치(작게 오므린 모양) 가 선호 되었다.
형식에 가득찬 삶.
주된 관심사는 연애였다.
그 속에서 삶의 허무감에 방황하는 내용의 많은 작품들이 남겨졌다.
<겐지모노카타리(원씨물어 源氏物語)>를 위시한 일본의 유명한 고전 문학, 헤이안 문학 작품들의 탄생 배경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