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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Oct 16. 2020

민(民)이 보여준 역사

고대 일본 민의 '부랑', '도망' 



역사에 있어서 국가와 민(民)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설명되는 경우가 많다. 

마치 양자가 본질적으로 대립하고, 갈등하는 ‘이류(異類)’처럼 간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일본의 고대 역사상(歷史像)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양자는 그 어느 한쪽 없이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기 어렵다. 

일본 정사 속에 '민'에 대해 ‘오호미타카라(大御財;왕의 보물)’라는 훈(訓)이 달려 있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시사점을 준다. 

물론 그 ‘오호미타카라’에 대해 당시의 지배자가 ‘무지한 백성’이라든지 ‘우민(愚民)’이라 표현하고, 동시에 ‘교도(敎導)’하고 ‘교화’ 해야 할, 격절된 거리감을 갖는 존재로 인식하였던 것 또한 사실이지만 말이다.         



여기,  그 ‘민’들이 펼쳤던 ‘부랑(浮浪)’, ‘도망(逃亡)’의 역사가 있다. 

연구사에서 ‘부랑’ ‘도망’은, 국가의 민에 대한 지배와 갈등으로, 민의 국가에 대한 ‘대항'이며 '싸움'으로 해석하는 입장이 주류를 이룬다. 역사가 자신이 '부랑’이나 ‘도망’을 옳지 않은 행동으로 간주하는 지배자들―사료의 역사관을 뛰어넘지 못한 현상의 하나이다.      


중국의 율령제를 받아들인 일본 고대 국가는, 민 지배의 기본정책으로서 호적에 근거한 본관지주의(本貫地主義)라는 토지긴박(土地緊縛)을 추구하였다. 그 긴박된 본적지를 이탈하는 것을 ‘부랑(본관지를 떠나 타 지역에 있어도 과역 부과 가능한 상태)’ 또는 ‘도망(과역 부과 불가능 상태)’이라 규정하였고, 엄정한 금지와 관리가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이었다(戸令絶貫条集解 古記).     


실제 정사의 기록을 살펴보면 

"(솔토의 백성이 사방으로) 부랑하여 과역을 기피한다." (<속일본기>養老元(717)年5月丙辰,霊亀元(715)年5月辛巳朔,天平宝字5(761)年3月甲辰),

 "요역을 기피하여 많이 도망한다."(養老4(720)年3月己巳), 

"과역 민이 대개 빈궁한 자가 많다. 조용(調庸)을 갖추어 바치는 것이 극히 어렵다. 도망하는 이유 또한 다른 것이 없다." (<삼대격>弘仁14(823)年2月21日), 

"부내를 순검 하니 읍에 살고 있는 이가 없다. 그 이유를 묻자니 과역을 피하기 위해 도망하여 타향으로 갔다 한다." (寛平5(893)年7月19日),

 "무릇 그 하민(下民)이 ……천한 이름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거짓으로 중한 과역를 피하여 가벼운 역(役)으로 부담하길 꾀한다."(貞観5(863)年9月25日) 등, 

부랑이나 도망의 현상은 모두,  ‘과역 기피’라는 관점에서 국가가 문제시 한 것이었다.

 

이러한 부랑, 도망 현상을 제어하기 위한 장치도 해 두었다.

 “오가(五家, 五戸;朱說)를 단위로 서로 보(保)를 구성하여, 장(長)도 정하고, 서로 어긋남이 없나 등을 검찰시키도록 하였다” (養老戸令五家条). 

보(保) 결합을 중심으로 하여 서로 감시하게 하고, 사람들의 출입 이동도 관리되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民이 이주할 가능성은 충분히 예상되었다. 

그래서 "호(戸)를 이탈하면 가장(家長)은 도(徒;징역) 3년"(戸婚律脱戸条) 등, 도망이나 부랑에 관련된 다수의 법령을 마련해 두었다(捕亡律丁夫雑匠在役亡条, 非亡浮浪他所条, 部内容止他界逃亡浮浪者条, 戸婚律娶逃亡婦女条, 僧尼令私度条 등).  

부랑, 도망 자뿐만 아니라, 도망치게 한 자도, 숨긴 자도 모두 처벌한다고 내세웠다. 국가의 주요 사안이었다는 점을 말해준다.


생계를 위해, 삶을 위해 유동하는 사람들의 행위가 국가에 의해 ‘부랑’이나 ‘도망’이란 범죄적 개념으로 해석되게 된 것, 여기에 이 ‘부랑’․‘도망’ 문제의 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한계 또한 있다.


그런데 8세기 중반 이후에는 부랑하는 사람들에게 조용(調庸)을 면제시켜 주기까지 해서 옥지(奥地)로 이주시켜 사쿠코(柵戸)로 만드는 등의 정책이 취해지게 된다. 누구도 그리 가고 싶어 하지 않는 동북 변지의 성책(城柵)에, 부랑인을 배치시켜 개간이나 농경에 종사시켰던 것이다(<속일본기>天平宝字2(758)年冬10月甲子, 天平宝字3(759)年9月庚寅, 神護景雲3(769)年正月 己亥, 同6月丁未条 등). 


특히 엔레키(延暦;782~806) 이후가 되면 국가가 보다 적극적으로 부랑인의 힘을 이용하였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것도 단순히 ‘부랑인’으로서가 아니라, ‘낭인(浪人)’이라고 하는 신분의 하나로 받아들이게 되고, 부랑 상태인가 아닌가에 관계없이 필요한 곳에서 활용하는 태도를 보인다. 


즉 이후 일본 고대국가에는 ‘낭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명실상부하게 존립하게 되었으며,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였다(<속일본후기>承和9(842)年8月丙子․동10年5月癸夘,<삼대실록>貞観8(866)年10月己夘․동15年12月戊申․동18年3月辛巳․元慶5(881)年2月丙戌․동3月壬戌․동7(883)年10月庚戌 등). 

9세기 이후에는 임기가 끝난 관리, 왕신(王臣) 자손의 무리가 본적지로 돌아가지 않고 낭인 상태로 살았던 흔적도 발견된다(<삼대격>斉衡2(855)年6月25日).     


국가 스스로가 "토인(土人;編付民)・낭인(浪人)을 논하지 않고" (延暦9(790)年10月癸丑,<삼대실록>貞観15(873)年12月17日,元慶5(881)年3月14日,<삼대격>寛平8(896)年4月2日․同9(897)年4月10日, 延喜2(902)年3月13日) 와 같은 입장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있다. 공존을 인정하면서, 그 힘을 적극 활용한다는 말이다. 

이로 인해 낭인 신분의 고착화를 조장하는 역할마저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고쿠사이(国宰, 관리)에 대적하고 군지(郡司)를 능멸"하는 ‘부호(富豪) 낭인’도 등장하게 되었으니 말이다(<삼대실록>元慶8(884)年8月4日).     


부랑인을 불법체류자로 규정하던 국가가, 스스로 그 ‘낭인’을 하나로 사회적 존재로 받아들이고, 결과적으로 많은 면에서 공존할 수 있는 장을 열었다. 국가에 대한 民의 관계를 과역 부담에 한정시키지 않고, 보다 다면적인 방향으로 전개시키는 길을 열었다. 본디 완벽한 ‘본관지주의’의 관철・‘토지긴박’의 철저 실현이라는 것 자체가, 당시 일본의 현실성에 따르지 않는 이상(理想)에 불과하다는 것을 국가 스스로 인지했던 것이리라.    

 

다발적 사회현상으로서의 ‘부랑’이나 ‘도망’은, 국가에 의해 제시된 방침에 따르지 않았다는 면에서는 반체제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고대의 ‘민’에게는, 국가의 과역이 힘겨워질 때나 생계의 환경이 불안정해졌을 때, 거주지를 떠나 ‘부랑’하거나 아예 종적을 감춰 ‘도망’해 버리는 방법이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이동, 불안정한 현상의 타계 이외로도 개척 등에 의한 새 터전 찾기 등과 같은 종종의 사연이 ‘부랑’․‘도망’ 안의 실 이유로 존재했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중세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장원 등의 경작지를 방기하고 떠나는 '도산(逃散)'의 방식으로 체제로부터 이탈하여, 생존의 길을 열어 나갔다. 

 ‘민’이 보여준 역동의 역사들이다.


*그림은 공물을 받치러 온 민(民)(春日権現験記絵巻 동경국립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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