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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리 Sep 04. 2020

‘두려움’을 키운 원령 이야기

(일본영이기2)

         

 사람에게 두려움을 키워준 것이 종교의 실체”라는 지적이 있다.  


<일본 영이기(日本靈異記)>라는 불교 설화집을 읽으면 그 말이 어느 정도 타당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두려워해야 한다’는 의식을 조장하는 다수의 이야기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절을 지어 그 절의 물건을 함부로 써서 돌려주지 않아, 소로 태어나 부려진 이야기’(中9) 편을 보면


 “이에 여러 권속(眷属)과 동료가 참괴(慚愧)한 심정에 두려워함이 극치를 이루었다. 생각건대, 죄를 짓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어찌 응보가 없겠는가.……부디 바라건대 참회함이 없는 자도 이 기록을 보고 마음을 고쳐 선(善)을 행할 것을.……기근의 고통에 시달려 뜨거운 쇳물을 마실지라도 절의 물건을 마시지 말라……참으로 알겠다. 인과 없음이 아님을. 어찌 삼가 두려워 조심하지 않으랴”      


 이 같은 이야기는 마치 불교적 인과의 가르침을 주고자 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 배경을 살펴보자면 절의 물건을 빌려 쓰고 돌려주지 않으면 엄청난 응보가 있다는 죄의식을 조장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절의 물건’에 대한 강조는 당시의 절이라는 것 자체가 소유와 무관하지 않은 분위기 속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적으로 유행하던 대차(貸借) 관계, 즉 고리대업에 절 또한 관계하면서 영리 취득의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 절이 취한 소득, 소유물에 대해서는 이를 종교적 차원으로 합리화하였다(관련 설화는 중국에도 있다. 그러나 <일본 영이기> 등을 통해 계승되어 강조되었음). 

그러면서 그들의 논리가 결론적으로 이와 같이 그 인과의 대가를 ‘두려워해야 하는’ 죄의식을 심어주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 영이기>上10·20·中15·32·下26 등도 유사한 이야기들).      


일본인의 역사 속에 보이는  ‘두려움’의 의식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원령(怨靈) 사상에 대해서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작품 ‘모노노케 희매(物の怪姫)’가 한국에서 ‘원령공주’로 번역되어 소개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 주인공 ‘원령공주’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쳤는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상 ‘원령’이란 죽은 자를 뜻한다. 그것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서 말이다. 즉 원령 사상이란 “(억울하게) 죽은 영이 저주를 내린다”는 생각이 유포된 것이다. 그 기원을 역사적 입장에서 보자면 다음과 같다. 


 8세기, 당시 정계에서 활약하다 츠꾸시(築紫)로 좌천되었던 겐보(玄昉) 스님이 죽자


 “세상에서 전해 말하길, '후지와라 히로츠구(藤原広嗣, 겐보를 제거하려고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해 죽음)의 영(霊) 때문에 해를 당한 것이다’고 하였다”(<속일본기>746년6월18일조)


는 기록이, 원령 사상의 맹아로 보아진다. 


이후 792년 간무(桓武) 천황 시절,

 "황태자(安殿親王)가 오랫동안 병에 눕자, 이를 조정의 진기칸(神祇官)에게 점치게 하니, 사와라 신노(早良親王;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귀양 가다가, 곡식을 끊고 사망. 후에 스도(崇道) 천황으로 추존됨)의 저주(祟り;타타리)"라는 결과가 나왔다(<일본 기략>792년 6월 10 일조). 


그리하여 사와라 신노의 “원령에 사죄하기 위해 각 쿠니(国, 행정지역)에 소창(小倉)을 세우고 정세(正税)를 납입시켜 나라가 관리하는 국기(国忌), 봉폐(奉幣)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일본 후기>805년 4월 5 일조). 

이것이 일본 역사상 원령에 대한 공식 기록의 초견(初見)이다.


 사실 이는 당시 790년부터 간무 천황 주위의 인물들이 차례로 병에 걸리거나 연속적으로 죽거나 하였던 상황, 전국적으로 가뭄과 기근, 역병의 유행이라는 어려운 정국이 그 배경에 있었다. 


간무 천황은 처음에는 사은(賑給)이나 은사(恩赦)와 같은 유교적 덕치주의에 의한 처치나, 신사에 봉폐하고, 불탑을 정비하는 등으로 수습하고자 하였으나, 사태가 진정되지 않았다. 

그러다 이것이 ‘원령에 의한 재이(災異)’로서 생각되게 된 것이다. 재해가 일어난 원인이 억울하게 죽은 사와라 신노의 원령에 의한 것이라고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이후 모든 재이의 원인이 원령에 의한 것으로 해석되었다. 

당시 왕위 계승의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던 시대였고, 이들이 ‘원령’이 되어 보복을 한다고 믿어졌던 것이다. 여기에 사람들이 이해하던 불교적 응보론이 한몫 더해졌음은 물론이다. 



 일본에서는 일찍이 810년부터 1156년까지 347년간이나 사형이 정식으로 금지되었던 역사를 자랑한다. 

그러나 그 내용을 살펴보면 사실 인도적인 동기라기보다는, 사예기피(死穢忌避, 죽은 자와의 접촉을 꺼림) 사상과, 불교에 의한 악인악과(悪因悪果) 사상에 더불어 바로 이 원령 공포의 사상에 의한 것이었다는 지적이 있다(利光三津夫<平安時代における死刑停止>, 稲岡彰 <怨霊思想と死刑停止> 등). 


810년 당시 병마에 시달렸던 사가(嵯峨) 천황은 그 원인을 역시 사와라신노와 같이 정치적 사건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인물들의 원령 때문이라 생각하였고, 이에 사형은 법적으로 금지되었던 것이다. 

사가 천황의 유계(遺誡) 속에는 “세간에서는 물괴(物恠, 모노노케)가 있을 때마다 선령(先霊)의 저주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온당치 못하다”는 내용이 보이기도 한다.


 사료를 살펴보면 원령 사상은 점점 더 승승장구하여 일본인들의 정신세계를 물들여갔다.

 ‘저주’를 내리는 사령(死靈)들이 국가에 의해 고매한 ‘어령(御靈)’으로 승격되고, 863년부터는 국가가 정식으로 이들을 제사 지내는 어령회(御靈會;고료카이)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결국 고래로부터 일본인들의 정서 속에는 ‘저주다’, ‘원령이다’ 하는 것에 대한 깊은 두려움의 의식이 심어지고,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미치자네(道真)의 원령(怨霊) <北野天神縁起絵巻>(北野天満宮 소장)



가미 고료사(상어령사 上御霊社;上京区御霊*町) 시모 고료사(하어령사 下御霊社;中京区下御霊町)

; 8명(八所)의 어령(御靈)을 모심. 어령이란, 정쟁에 휘말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영으로 숭배의 대상임과 동시에 역병을 가져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일본인들은 죽은 혼령을 ‘호토케(仏)’라 부른다. 

이에 대해 “어떤 악인(惡人)도 사후에는 책임이 없다는 것이며, 극 악인 등이 비범한 영적 존재라 생각되던지, 살인자나 도적 등의 범죄자의 영을 모신다든지, 그 묘지에 참배 간다든지 하는 현상”은, 일본인이 “관용 유화(寬容宥和)의 정신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학자(中村元選集3<日本人の思惟方法>)도 있다. 


또 일본인들이 전쟁터에서 죽은 적을 위해 추모탑을 세우는 것은 인정이 풍부한 행위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보았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이 같은 행위들은 모두, 불교에 의한 인과 응보론적 죄의식이나, 일본인들의 정서의 근저에 뿌리내려온 원령이나 저주의 관념 등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를 무마시키고자 하는 자기 해소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아무튼 각자 자기 입장에 따라 아는 대로 말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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