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쟈크모노가타리슈6>
일본에서 10년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 내게 생긴 변화가 하나 있다.
그게 뭐냐면, 내 어깨가 점점 쪼그라져 갔다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자세를 낮추며 공손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인데, 계속 “스미마셍(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을 연발하며 다니다 보니 그리 된 듯하다. 그 말과 더불어 내 자세도 자꾸 웅크러 들어가, 그렇지 않아도 작은 내 키가 한층 더 작아진 크기로 다녔던 느낌이다.
일본에 살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리 되는 이 ‘조심, 조심성'에 관한 이야기가, 이미 11세기의 책 <곤쟈크모노카타리슈>를 통해서도 엿보아진다.
지금으로 보면 옛날이지만, 우근위부(右近威府; 궁정 수비 담당)의 중장(中将) 아리하라노 나리히라(在原業平)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극히 이름 높은 호색가로, ……어느 집 딸이 용모가 몹시 예쁘다는 소문을 듣고……그녀를 몰래 훔쳐내었다. 그런데 데려가 숨길 곳이 없어…… 기타야마시나(北山科) 근처의 오래된 산장의, 황폐하여 사람도 살지 않는 곳……그 집 안에 커다란 창고가 있었다.……그 창고 안에 다다미 1장을 준비해 그 여자를 데리고 가서 누웠는데, 갑자기 천둥번개 괴성이 울려 퍼지니, 중장은 여자를 뒤쪽으로 밀어 보내고, 일어나 대도(大刀)를 빼어 들고 대항하며 칼날을 번뜩였다(당시 번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금속(칼)이 유효하다고 생각되었다). 천둥번개도 점점 조용해지고, 날도 밝았다.
그런데 여자가 소리도 없어서 중장이 이상하게 여기고 뒤를 돌아보니, 여자의 머리와 입고 있던 옷가지만 남아 있었다. 중장은 기이하고 두려워서, 옷도 못 챙기고 도망가 버렸다.
……그렇다면, 사정도 잘 모르는 곳에는 절대 가면 안된다. 하물며 머무르는 일은 생각도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 전해져 온다.(27-7)
<곤쟈크모노가타리슈>27권은 부제가 ‘본조 부 영귀(本朝付霊鬼)’라고 붙여있듯이 초자연적 존재, 즉 이렇듯 주로 괴이한 귀신 담을 싣고 있다.
<곤쟈크>의 편자는, 이러한 초자연적 괴이 담을 소재로 들면서 결국은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위 27-7화를 통해서도, “사정도 잘 모르는 곳에는 절대 가면 안된다. 하물며 머무르는 일은 생각도 말아야 한다”와 같이 말이다.
온갖 일화를 실은 뒤에는 반드시 이렇듯 '올바른 처세 방법'을 한소리 더한다. 그 주된 주장인즉 다음과 같다.
실로 사람은 목숨보다 중한 것이 없으니, 쓸데없이 용맹심을 보이려다 죽는 것은 극히 쓸모없는 짓이다.(27-4)
여자는 이처럼 인적이 드문 곳에 잘 모르는 남자의 부름에는, 세심의 주의를 해서 가서는 안된다. 절대 두려워해야 한다.(27-8)
그러한 장소에는 혼자 들어가서는 안된다.(27-15)
사정을 모르는 오래된 곳에 가서 자서는 안된다.(27-17)
마음이 현명하고 지혜 있는 사람에게는 귀신이라도 나쁜 짓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려 없고 어리석은 사람이 귀신 때문에 … 당하는 것이다.(27-31)
길을 헤매 잘 모르는 곳에 가게 되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27-37)
인적이 드문 들판 등에 혼자 있을 때, 예쁜 여자 등이 보이면 주의하고 다가가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27-38)
이런 일이 있을 때에는 침착하게 생각을 잘 해야 한다.(27-39)
종자(從者)라 하더라도 마음 놓으면 안 된다, 모르는 자는 의심해 보아야 한다.(29-7)
지나친 것은 그만 두는게 낫다. 단지 적당히 하는 것이 좋다.(29-31)
나보다 뛰어난 것을 쳐부스려는 마음은 절대 그만 두어야 한다. 도리어 내 생명을 잃는 일이 된다.(29-33)
약속을 깨고 비밀을 발설하는 일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31-13)
전혀 상황을 알 수 없는 곳에 가서는 안된다. (31-14)
절대 믿지 못할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31-19)
강한 욕심은 그만두어야 한다.(31-22)
주로 이런 식의 경구가 많다.
‘해서는 안된다’, ‘주의해야 한다’,‘의심해 보아야 한다’, ‘그만두어야 한다’ 등, 자신이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을 제일의 해답으로 제시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내가 일본에서 살 때도 언제 어디서나 자주 듣고, 자주 말하던, ‘기오츠케테 구다사이(気をつけてください;조심하세요)’하는 소리가 지금도 귀에 생생히 들리는 듯하다. <곤쟈크모노카타리슈>로부터 지금의 21세기까지, 수백 년 세월의 간극을 면밀히 따라가 살펴보다 보면, 긴 호흡 속을 이어온 일본인의 정서가 느껴진다.
일본인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타인에 대한 '오모이야리(思いやり;배려)나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것을 강하게 교육시키는 모습을 보곤 하였다. 이는 사실 자신이 당할 피해를 경계하고 우려하는 마음과 둘이 아니다. 서로가 조심하고 어떻게든 피해 주지 않고, 피해 당하지 않는 것을 인간관계에서의 최우선의 바름이라 여기고 살아온 사람들.
지금까지 혹여 폐를 끼치게 되는 것은 아닌가 늘 조심하느라 더 다가가지 못하고, 또 폐를 끼친 것이 아닌가 염려되어 ‘미안하다’를 연발하며 관계를 맺어온 일본의 지인들에게, 우리네 한국식 인정의 맛을 세련되게 알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