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자 김태렴 일본 가다
한반도의 자료 속에는 보이지 않으나, 통일 신라 시절에도 일본을 찾아 간 ‘신라 왕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김태렴(金泰廉)이다.
그는 귀화하러 간 것이 아니고, 용무가 있어 갔다. 어떤?
그에 관련된 기사가 일본의 정사 <속일본기>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① 다자이후(大宰府;규슈지역 관리 관청)가 아뢰길 "신라 왕자 한아찬(韓阿湌) 김태렴과 조공사(貢調使) 대사(大使) 김훤 및 송왕자사(送王子使) 김필언 등 700여 명이 배 7척을 타고 와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하였다.(天平勝寶4(752)年 閏3月 22日)
②사자를 오우치(大內;텐무(天武), 지토(持統) 천황 능), 야마시나(山科;텐지(天智) 천황 능), 에가(惠我;오진(応神) 천황 능), 나오야마(直山;겐메이(元明), 겐쇼(元正) 천황 능) 등의 능(陵)에 보내 신라 왕자가 왔음을 고하였다(閏3月 28日).
③신라 왕자 김태렴 등이 조정에 와서 인사하고(拜朝) 조(調)를 받쳤다.
(신라 왕자가) 아뢰길 "신라 국왕이 일본에 조림(照臨)하신 천황의 조정에게 말하길, 신라국은 원조(遠朝)로부터 시작해서 대대로 끊임없이 내일 하여 국가(일본 조정)에 공봉(供奉)하였습니다. 지금 (신라) 국왕이 친히 와서 조공하고 조(調)를 받치고자 하였으나, 하루라도 (나라에) 주인이 없으면 국정이 혼란될 것으므로……왕자 한아찬 태렴을 보내, 왕을 대신해 필두로 하여 부하 370여 명을 이끌고 입조 하여, 종종의 조를 받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조(詔)하여 답하길 "신라국은 원조로부터 대대로 끊임없이 국가에 공봉하였다. 지금 다시 왕자 태렴을 보내 입조 하고 또한 조를 받치니, 왕의 성심에 짐은 기쁘다. 지금부터 오래, 멀리 무존(撫存) 해야 할 것이다. "
태렴이 또한 아뢰길 "보천지하(普天之下)에 왕토가 아닌 것이 없고, 솔토지병(率土之浜)에 왕신(王臣)이 아닌 자 없습니다. 태렴이 다행히 성세(聖世)를 만나 내조하여 공봉하였으니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사적으로 스스로 준비한 국토의 미물을 삼가 받칩니다."
조(詔)하여 답하길 "태렴이 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라고 하였다.(6月 14日)
④ 신라사를 조당(朝堂)에서 향연 하였다. 조하길 "신라국이 와서 조정이 공봉한 것은 오키나가타라시히메노오키사키(氣長足媛 皇太后, 神功皇后)가 그 나라를 평정한 이후이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번병(蕃屛)이었다. 그런데 전왕(前王) 승경(承慶;효성왕)과 대부(大夫) 사모(思恭) 등은 언행이 태만하고 항례(恒禮)를 어겼다. 따라서 사절을 보내 죄를 물으려 하던 참에, 지금의 왕 헌영(軒英;경덕왕)이 지난 잘못을 후회하고 고쳐서 친히 (우리) 조정에 오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정을 염려하여 왕자 태렴 등을 대신 보내고 입조(入朝)케 하여 조를 받쳤다. 짐은 따라서 대단히 기쁘므로 관위를 내리고 선물을 사여하고자 한다."
또 조(詔)하길 "금후로는 국왕이 친히 오면 말(辭)로서 아뢸 것. 만일 그 밖의 사람을 보내 입조케 하면 반드시 표문(表文;외교문서)을 가져오게 하여라"고 하였다.(6月 17日)
⑤태렴 등은 다이안지(大安寺)와 도다이지(東大寺)에 가서 예불(禮佛)하였다.(6月 22日)
⑥태렴 등이 돌아가 나니와 관(難波舘;오사카의 사신 접대 관저)에 거하였다. 칙(勅)을 내려 사자를 보내 시포(絁布)와 주효(酒肴)를 사여하였다.(7月 24日)
통일신라 시대의 양국 간 교류는 제법 활발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697-803년 까지 신라사 23회.700-779년까지 견신라사 16회 파견, 799년 견신라사 파견 중지 이후에도 7회 파견 기록 등).
신라에서는 이미 백여 명이 넘는 대형 사신단이 일본에 출입하고 있었다(742년 2월, 신라 사신 등 187명 내일 등).
이런 와중에 일본 조정과 신라사절단 사이에는 종종 외교 의례상의 마찰이 빚어지기도 하였다(743년 4월 25 일조 등).
신라는 일본 조정이 요구하는 외교 의례--‘조(調;조공품)’를 가져올 것,‘국서(국왕의 외교문서)’를 가져올 것-- 등을 지키고 않으면서도, 일본 귀족들이 선망하는 많은 물품을 가지고 왔다. 대량의 인원을 동반하여 일본에 와서 많은 ‘상매(商賣)’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식 율령을 받아들여 머릿속‘화이관(華夷觀)’에 젖어 있었던 일본 조정은, 신라 사절의 태도가 정식 사절로 대우하기 미흡하다 비난하면서도, 그 선진 물품에 대한 욕구를 끊지 못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752년 ‘조(調)를 바치러’ 왔다는 신라 왕자 김태렴의 내일(來日)은, 일본 조정의 입장에서 대단히 중대한 외교사로 기록된다. 그에 관련된 기록이 세세하다.
일본 조정은 즉시 대대 선대의 천황 능에 신라 왕자가 왔음을 보고한다. 신라 사절들에게 향연을 베풀고 견, 포, 술 등으로 환대하는 등,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며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김태렴의 일행 중 370여 명이 일본의 중앙조정에 들어가 외교 의례를 치렀던 것으로 보면, 나머지 330명 정도는 아마도 상인의 무리일 가능성이 크다.
좋은 분위기를 타고, 일본 조정에서는 다음 해 753년 2월(辛巳), 종 5위 하 오노노 아손 다모리(小野朝臣田守)를 외교 대사로 하여 신라로 파견한다.
이에 관련해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남아 있다.
(753년 8월) 일본국 사신이 왔다. 오만무례하여 왕이 만나주지 않았다.
일본 조정을 기쁘게 만들었던 신라 왕자 김태렴의 일본 방문 이후, 한일 외교 무드는 다시 ‘불신’이 깊어졌고, 일본 조정에 의한 신라 사절 ‘방환(放還;돌려보냄)’이 이어졌다.
<삼국사기> 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에게 처음 왕자가 태어난 것은 758년 가을 7월 23일이었다. 760년 가을 7월, 왕자 건운(乾運)을 왕태자로 봉하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752년 일본 조정에 갔던 ‘김태렴’은 과연 진짜 신라 왕자였을까? 논의가 분분하다.
그는 왕자를 가장한 상인단의 우두머리였을 것이다, 단순한 왕족 혹은 신라 귀족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중국의 화번공주제(和藩公主制;주변국 왕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임의로 공주의 작위를 내림)와 같은 가왕자(仮王子)였을 것이다 등등.
‘신라 왕자’ 김태렴은 왜 일본에 갔을까?
남겨진 기록 속에서 우리의 답을 찾으며, 그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는데 고심하게 된다.
8세기 중엽, 700여 명, 7척의 대인원을 거느리고 일명 ‘신라 왕자’는 일본에 갔다.
신라로부터의 선진 문물에 대한 일본인들의 강렬한 욕구가 있었고, ‘신라 왕자’라는 타이틀이 일본 조정에 의해 크게 환영받던 시절이었다.
단지 그 결과가 ‘양국 우호’로까지 이어지지 못했던 점은, 지금 생각해도 왠지 애석하게 느껴진다.
정창원(正倉院) 조모입녀(鳥毛立女) 병풍의 하첩(下貼)으로 사용된 <신라 물품 구입신청서>(前田育徳会 소장)
*현존하는 정창원(正倉院;쇼소인)은 동대사(도다이지) 정창원을 가리킴.
쇼무 천황의 유품 등 천황가의 보물(정창원 어물 正倉院御物) 1만여 점이 보관되어 있다. 대부분 8세기 나라(奈良)시대의 것이 많고, 칙봉(勅封)으로 보존이 잘 되어 있다. 궁내청(宮内庁)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