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의 역사관은 어떠한가, 한반도에 대해 어떤 의식을 가지고 있나를 먼저 우리 학생들이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일본의 정사(正史) <일본서기> <속일본기> 등의 사료에 나오는 한반도 관계 기사를 수업시간에 다룬 적이 있다.
한 학생이 갑자기 손을 들더니,
“교수님은 왜 일본에 유리한 자료를 다룹니까? 친일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강의 초년병의 당황함도 있었지만, ‘이런 시절에 젊은 학생이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적지 않게 놀랐다.
그 뒤부터 강의 중간중간에 익숙한 일본말이 튀어나오는 것을 조심하느라 초긴장의 수업을 하였다.
현대에도 세계 각국 젊은이들이 민족주의적 의식을 고취시키는 역사교육 아래 놓여 있다는 점이 지적되곤 한다.
민족주의는 근대국가가 파생시킨 이념으로, 국민을 통치하기 위해 만든 도구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19세기 유럽의 지배자들은 강력한 국민국가로서의 통합과, 민족국가로서의 전통 만들기에 착수하였고, 역사가들을 활용하여 민족의 특수한 상징과 기억을 연구시켜 그것을 대중에게 보편적 기억으로 장착시켰다.
결국 이를 통해 강고해진 민족주의는 보다 더 많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1,2차 세계대전은 적어도 이러한 '국민 만들기'가 성공적이었음을 방증하는 사건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이 같은 민족주의가 21세기의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부상되었다.
미국의 트럼피즘(Trumpism;사실상 백인 민족주의), 푸틴의 애국 전쟁 신화(러시아 민족주의), 인도에서는 아리안 민족주의, 헝가리, 동유럽 국가들의 기독교 민족주의, 신형 대국론을 말하는 중국의 중화 이념 추구 작업 등이 벌어졌다(윤상욱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 정승민 <역사 권력 인간>).
세계 강국들은 여전히 역사연구, 역사 교육을 그들의 권력적 기득권 유지를 위해 활용하고 있다.
민족이나 국민이란 것은 '상상'을 통해 존재하는 것일 뿐이라고(베네딕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아무리 말해도, 현대 인류가 지탱하는데 있어 그 같은 개념은 여전히 유효성을 가지고 현존한다.
이들은 자국 우위, 자민족 우월성의 주장을 바른 것이라 생각하고, 이에 반하는 역사 환경적 입장을 가진 여타의 민족이나 국가에 대해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데 주저함이 없다.
과연 이를 누구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국 중심의 이기적 의식을 키우는 각 국의 역사 교육과 그로 인한 결과가 실제 세계에 만연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로부터 배우는 젊은이들의 의식은 한계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4-2
일본학과에 부임하고, 일본학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은 어떤 면에서 마음이 편했다.
먼저 현실의 일본, 일본인과의 만남을 성숙하게 이루어내게 하기 위한 교육이 중요했기 때문에, 우선은 역사적 과제, 한일관계의 숱한 문젯거리들로부터 한발 떨어질 수 있어서였는지 모르겠다.
학생들도 기본적으로 일본어 구사에 힘쓰니, 교수가 수업시간에 일본말을 해도 욕먹지 않을 것이라 좋았다.
또 개별적으로든 일본 체험들을 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도, 일본이라는 대상을 보다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역사연구, 역사수업이 지니는 사명감, 비판 이런 의식의 짐이 너무나 무거워, 지금껏 즐겁게 웃지 못하였다는 점도 깨닫게 되었다.
<일본인의 정신문화사>라는 원어 수업에는 한국 학생들을 위시해, 우리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와있는 메지로(目白) 대학 등의 일본 학생들, 그리고 어떤 학기에는 중국 학생들까지 함께 한다. 사료를 번역, 해석하면서 일본인들은 어떠한 정신적 가치를 키워왔는가 등을 두고 학생들 사이에서 자유토론이 벌어진다.
일본인 학생들이 함께 하는 자리이기도 하고, 한국 학생들의 발언에는 제법 신중함이 깃들인다. 하나의 경향성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함부로 평가하는 자세는 지양되는 듯하다. 상대를 대하는데 조심성 있는 배려가 눈에 띈다.
일본인 학생들과 친구가 되고 싶고, 일본에 가고 싶고, 일본 관계의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일본학과 학생들은, 역사나 이념에 갇히지 않고 실제 사람과의 직접적인 만남, 그리고 직접 일본인의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 그 자체를 열심히 듣고자 한다.
그러니 오히려 일본인과의 사이에 쌓인 문제를―그것이 어떤 문제이든―함께 대화를 해가며 선입견이 주는 오류들을 스스로 깨달아 가지 않을까 한다.
<한일 교류사>라는 수업에서는 전후 일본의 대외관계사 대가 이시이 마사토시(石井正敏) 등이 저술한 동아시아 교류사 등을 읽고 함께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역시 학생들은 자못 심각하다. 어둡고 무거워진다. 한반도와의 관계 면에서 볼 때 이러한 일본의 세계사관은 역시 “문제가 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일본 중심주의 입장이다”,“한반도를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등이며, 일본인의 역사관 속에서 소원하게 다루어지는 한반도인 당사자로서의 불쾌함도 표현한다.
그러다가 결국 “그런데 우리는 어찌하고 있나?”,“우리는 일본에 대해 진정성 있게 대하고 있나?”,“우리도 우리 입장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로 전환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렇게 서로의 생각이 다른 일본인과 실제 어떻게 해나가야 현명한 일인가? 이를 위해 나는 무슨 노력을 해야 하는가”, 나름대로의 문제풀이에 들어간다.
상대를 탓하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를 알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상대를 제대로 대해 보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상대의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나의 실력이며, 리드력이 발휘되는 순간일 것이다.
마음이, 의식이 큰 자가 참된 리더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세상의 이치일 것이다.
상대를 알고, 자신의 실력을 키워갈 때, 조금씩이라도 상대와의 문제를 풀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바꿔 갈 수 있는 것이다.
대학생들을 늘 대하고 사는 입장에서 말한다면, 나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충분히 그 주역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5. 에필로그-희망의 역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먼저 자기중심적 입장을 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먼저 내 입장을 놓고, “상대가 왜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인가” 상대의 입장에서 귀 기울여 들으려는 노력 없이는 상대와의 문제를 풀기 어렵다.
국가 간 분쟁의 출발은 바로 이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 “자기중심의 입장을 내려놓는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인간의 과제였다.
내 자신도 이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명상과 뇌과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나는 내 뇌 속의 나무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은 카메라와 똑같다. 카메라는 눈의 원리를 이용해 만들어진 것이다.
사람의 눈도 카메라와 똑같이 사진을 찍어 뇌에 저장한다.
사람이 평생 오감을 통해 보고 듣고 배우고 경험한 모든 것이 사진과 같이 뇌 속에 저장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내 뇌 속에서 쉴 새 없이 떠오르는, 나의 마음이다.
그런데 사람이 오감을 통해 인식하는 정보는 머리에서 몇 차례를 걸쳐 편집된다.
즉 "하나의 사과를 바라보면서도 각자의 뇌는 개개인의 편집 과정을 통해 서로 다른 사과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각자의 뇌 속에 저장된 정보, 즉 자기중심으로 형성된 의식(마음)은, 실제의 세상과는 다른 '허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허상'의 의식-자기만의 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부르스 후드가 지적했듯이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은 '환상', 즉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사람은 이를 '나'라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 자신은 환상” Bruce Hood 2012
오늘날 뇌과학의 발달로 이같이 인간 의식의 한계가 밝혀지고 있다.
이 뇌 속에 형성된 사진(의식)이 바로 스트레스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내 뇌 속 생각(마음)과 현실은 늘 괴리가 있으며, 그 내 뜻대로 안 되는 세상에 대해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이란 존재는 자기 안에 찍어놓은 사진(의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진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내 뇌 속에 그런 사진이 들어있으므로, 그런 생각을 하고 살게 된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고 싶지 않아도, 내 속에 그런 사진이 들어있으므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우울, 불안, 걱정, 중독 등과 같은 정신적 병폐나, 욕심, 집착, 미움, 좋음 등의 모든 인간 마음은, 내 안의 사진이 그 근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내 뇌 속에 떠오르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세상(진짜)이 아니라, 내 의식이 만들어 낸 가짜, '허상'이라는 점을 분명히 자각하는 것이다.
나는 명상을 하면서
'아, 정말 그렇구나! 이제까지 나를 괴롭히던 내 머릿속 숱한 생각들은 모두 내가 만들어 낸 것이었구나!
그때 그 순간에 상대를 내가 그렇게 바라보고, 그런 거라고 내가 그렇게 생각했던 거구나.
내 눈에 보이는 대로, 내가 느껴지는 대로 그게 맞다고 생각했을 뿐, 실제 상황을 나는 한 번도 <있는 그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이구나. '
'내가 미워하던 그 사람은, 실제의 그가 아니고, 내 마음에 안 들게 말하고 행동한다고 밉게 여기며 내 뇌 속에 찍어놓은 사진(허상)이었구나.'
이것을 마음으로 깨쳤을 때에는 정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내 속에서 울고 웃고, 원망하고, 내 마음과 다르다고 힘들어했던 것들이 어이 없어지고, 부질없고 부끄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명상으로 그런 깨침을 반복하게 되면서, 이제는 더 이상 머릿속에 떠오르는 나의 생각 덩어리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다.
번뇌에 끌려가지 않고, 마음수련 명상 방법으로 버려 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속이 고요해지고, 편안해졌다.
내 속이 편해지니까 세상을 바라보는 심정도 저절로 평안해졌다.
자기중심의 의식은 상대가, 세상이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다.
지난날 인류가 역사 교육 등을 통해 자민족 중심주의 의식을 고취시키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 인류가 많은 피를 흘렸다.
한 나라의 권력자가 자기중심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과정에 무고한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다.
국가니 민족이니 거대해 보여도, 그 모든 것은 결국 인간 마음의 허, 허기로부터 비롯된 참담한 흥망성쇠―아무리 애써 쌓아 올려도 그 결과는 망(亡)함이요, 쇠(衰)함―의 역사였던 것이다.
역사 속 사료를 들여다보면서, 국가나 민족을 이야기하는 커다란 담론을 잠시 내려놓고, 먼저 인간의 마음부터 해결해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국가도 민족도 또 그 인간 마음이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수 천 년 전의 인류인 노자는 일찌감치 '자승자강(自勝者强)'을 말하였다. 자기를 이긴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입장, 이기적인 마음을 이겨 넘어간다는 말이다. 그것이 가장 최고위의 승리자라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나의 마음이 해결되어야, 비로소 나와 함께 살아갈 사람들, 세상에 대해 마음이 열리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들으려 할 것이고, 그리하여 세상과 함께 공존(coexistence)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교육도 이런 의식을 키울 수 있을 때, 젊은이들을 진정한 세계인으로 키워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자기중심적 마음 때문에 망해 버리고 마는 역사를 만들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